책/칼로 새긴 장준하 53

019. 장준하 일대기 06 - 이간질에 농락당하다

성공한 탈출 - 필담, 우리는 한국청년이오 장준하 일행이 끌려온 곳은 산속에 구축해 놓은 진지였다. 진지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게 보였다. 방공호는 넓고 깊었으며, 진지 주위는 흙을 넣어 만든 포대로 에워쌌다. 진지로 가는 길목에는 적의 염탐이나 기습을 막기 위해 몇 겹으로 경비병이 배치됐다. 경비병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고 몸수색을 한 뒤 수신호를 나누며 길을 열었다. 장준하는 대장이 기거하는 집무실로 끌려가 앉았다. 집무실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자신의 의사가 정확히 전달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목숨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리라 마음먹었다. 집무실에 유격대 대장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018. 장준하 일대기 05 - 나라 잃은 설움을 참다

일념 - 빨리 오시오, 먹어요 장준하 일행은 중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을로 내려갔다. 일본군인 양 행세해 밥을 얻어먹을 궁리였다. 중국인들이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일행은 순찰을 도는 척하며 음식을 얻어먹고, 수통에 물도 채웠다. 15리 밖에 쓰카다부대가 있는 것도, 30리만 걸으면 중국군이 주둔해 있는 것도 알아냈다. 이들은 마지막 행군을 준비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일행은 주머니에 남은 돈을 모두 털어 음식과 과일을 구입하고 북쪽 산을 넘기로 했다. 산은 가파르진 않았지만 쉽게 오르내릴 경사는 아니었다. 장준하 일행은 양지바른 자리에 앉아 배낭 속에 넣어둔 과일을 꺼내먹고 막 일어날 참이었다. 어디에선가 고함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청년들이 오라고 손짓..

017. 장준하 일대기 04 - 사선을 오가다

홍석훈을 살려라 - 홍동지 장준하 일행은 오랜 행군으로 기진맥진했다. 중간중간 잠시 땅바닥에 누워 힘을 저장하는 것 빼고는 피로를 회복할 방법은 없었다. 일행은 발바닥이 부르트고 장딴지가 단단하게 굳어 갔지만 기계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군 관할지역에서 벗어나려면 잠시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일행은 사방에 컴컴한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골짜기에 들어섰다.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조심조심 걸음을 뗐다. 일행 중 홍석훈이 갑자기 주저앉듯이 쓰러지더니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술 취한 행인이 길바닥에 쓰러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가 푹신한 흙바닥에 부딪쳐 뇌 손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준하는 깜짝 놀라 차갑게 식어 가는 홍석훈의 온몸을 주무르..

016. 장준하 일대기 03 - 목숨을 걸고 강행군에 나서다

관동대지진의 악몽 - 철조망 너머… 연병장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고함과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본군은 학도병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영육을 혹사시켰다. 전투훈련 시간을 무리하게 늘리거나 군가, 훈련교본 등을 외우게 하면서 학도병들이 아예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장준하는 쉼 없이 펼쳐지는 군사훈련 중에도 인근 지형지물을 관찰했고, 탈출 경로를 파악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일본군 교관에게 억지로 말을 붙여 중국군의 상황을 알아냈다. 임시정부에 가지 못하더라도 인근에 주둔한 중국군 부대로 탈출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중국도 일본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싸웠다. 장준하는 동북방으로 탈출 방향을 잡고..

015. 장준하 일대기 02 - 조국 독립을 위해 탈출을 결심하다

핏발 선 흰자위 - 말똥 치우기 그해 겨울은 어느 해보다 유별나게 추웠다. 대동강은 바짝 얼어붙었고, 매서운 북풍은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잡아챘다. 일본군 부대가 위치한 평양 외곽은 더욱더 맵찬 눈보라가 요동쳤다. 온몸을 발발거려도 손발에 온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장준하는 200여 명의 학도병들과 함께 일본군 제42부대로 끌려왔다. 학도병들은 이가 갈릴 정도로 날이 찬 데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까지 밀물처럼 밀려와 흰자 위에 핏발이 섰다. 장준하는 군대가 형무소 같았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끌려와 방한조차 되지 않은 막사에서 썩어야 한다는 생각에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는 머릿속을 짓누르는 고통을 인내했다.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부대 안팎을 염탐하는 일을 게을..

014. 장준하 일대기 01 - 강제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다

식민지 조국에 태어나 - 세상에 맞서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석인 목사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독학했다. 아버지는 총명하고 언행이 바른 그를 공부시키지 못해 두고두고 후회하다 뒤늦게 대관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입학시켰다. 또래보다 영특한 장준하를 보고 교장이 특별히 배려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신앙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다. 옷차림은 가년스럽고, 먹을거리는 변변치 않고, 한 방에서 부모형제와 함께 잠을 잘 정도로 생활은 궁색했지만 얼굴엔 구김새가 없었다. 늘 가난한 이웃을 돕길 원했고, 아래 동생들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 의주 주민들은 오랑캐보다 왜구에 더욱 적대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선조는 임진..

013. 의문의 죽음들 13 - 등신불, 정 중령 죽음의 비밀

김유진 기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잇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강동일 형사만 쳐다봤다. 강 형사가 부검의의 죽음을 알린 직후였다. 김 기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검의가 죽음을 예감한 것 같네요. 앞으로는 선배를 만나러 가고, 뒤로는 저에게 정 중령 부검 서류를 보내왔어요. 심부름 온 사람은 수고비 받고 온 대학생이더라고요. 그에게는 더 이상 캐낼 게 없었어요.” “사인은 뭐였어? 진짜 자살이 맞아? ” “그게 좀 이상해요. 정 중령이 군사기관이 아니면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화학무기로 죽었거든요. 보툴리누스균이라고.” 김 기자와 강 형사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졌지만 그것이 진실이 되는 순간 커다란 파장을 낳았다. 진실을 희구하는 동시에 진실이 ..

012. 의문의 죽음들 12 - 감출 수 없는 진실, 부검의의 죽음

강동일 형사는 책상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팔이 찌릿해질 때까지 누워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그래도 자괴감 같은 것이 꾸물꾸물 올라오거나 가슴이 먹먹해질 때면 가끔씩 휴게실 소파에 담배를 물고 벌러덩 누웠다. 따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는 것처럼 긴장이 풀렸고, 사건 하나하나를 더듬으며 되새기는데 그만한 자세는 없었다. 벨소리가 강 형사를 일으켰다. 머리에 눌렸던 팔에 피가 통하면서 전류에 감전된 듯 관절 마디마디가 새근새근 저려왔다. 전화한 사람은 정상일 중령의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였다. 그는 30분 뒤 한강철교 남단 교차로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강 형사는 곧바로 뛰쳐나갔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정 중령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011. 의문의 죽음들 11 - 살해 위협, 불길한 전조

소영은 작은 소리에도 놀라 자꾸 힐끗힐끗 뒤돌아봤다. 큰소리가 들리면 아예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죽더라도 칼을 들고 달려드는 자와 눈이 마주치는 고통은 피하고 싶었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쥐를 물고 살금살금 눈앞을 스쳐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소영은 느닷없는 상황에 놀라 주춤했다. 작고 날쌘 쥐도 먹이사슬 앞에서는 처참한 능욕을 당하나 싶어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이에 물린 쥐가 마치 자신 같았다. 페르시안 호텔 커피숍. 미행은 없었다. 얼씬거리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급히 호텔 출입문을 밀었다.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호텔리어가 문을 쭉 잡아당겼다. 소영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호텔 로비를 지나 총총걸음으로 커피숍에 들어갔다. 멀리서 사내가 반쯤 일어..

010. 의문의 죽음들 10 - 비밀조직, 거짓 자수

책상 하나에 의자 두 개. 강동일 형사의 건너편에 임일수가 앉았다. 취조실은 조국 산천의 풍경을 담은 달력 하나 걸려 있지 않아 분위기가 삭막했다. 좁은 공간을 환히 비춰주는 백열등과 허연 김을 뿜어내는 커피가 아니라면 질식할 만했다. 임일수의 얼굴은 무척 수척했다. 회색 콤비 상의에도 알록달록한 때가 스며들었다. 며칠 동안 반복된 취조와 유치장 생활이 한눈에 짐작됐다. 강 형사는 오늘은 꼭 임일수의 입을 열게 만들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자존심을 박박 긁어 흥분하게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얄미웠다. 그러나 임일수는 모든 게 귀찮은 사람처럼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비밀조직」이라는 책 봤어요. 묘하게 애국심을 자극하더군요. 소설인데 실화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기도 하..

009. 의문의 죽음들 09 - 달걀로 바위 치기, 자살할 이유

‘상기 피해자의 부검 결과(중략) 사망 원인은 상행대동맥 자상으로 본다. 문구용 칼로 목을 그어 절명했다. 문구용 칼에서는 피해자의 지문만 발견됐으며, 목을 벤 칼의 각도를 봐서는 오른손으로 실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이외에 다른 신체 부위에는 어떠한 외상도 없다.’ 강동일 형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건 끝났네. 종결이야.” “강 형사. 현장 사진 봤잖아. 칼로 목이 베였는데 바닥에 피가 한 방울도 없었어. 이수미 경위는 이미 죽은 사람을 칼로 베서 그런 거라고 추론하던데, 국과수는 자살이라고 결론 내 버렸네. 납득이 가지 않아. 목을 매거나, 팔목에 칼을 대거나, 독극물을 마시거나, 분신하거나, 절벽에서 투신할 수 있지만 자기 목을 스스로 베기는 쉽지 않단 말이지.” “그렇긴 한데, 어떻게 할..

008. 의문의 죽음들 08 - 부검, 자살과 타살 사이

남청색 제복을 입은 이수미 경위가 힘차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출입문을 밀고 나와 걸어왔다. 애타게 부검 결과를 기다리던 김철수 형사는 간이 소파에서 일어나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부검소견서를 받아 들었다. 골치가 상당히 아팠지만 이 경위에게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경위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화장품 냄새가 항상 은은하게 풍겼다. 미소는 아름다웠고, 태도는 빈틈없이 발랐으며, 까다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뒤에서 묵묵하게 챙겨주는 스타일이었다. 김 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정 중령의 부검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자살이었다. 그는 부검 결과서를 쭉 읽어 내려가며 체념한 듯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경위는 부검 결과의 타당성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007. 의문의 죽음들 07 - 소영의 편지, 더해가는 궁금증

강동일 형사는 정상일 중령의 사건 기록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청다방에 들어갔다. 송 마담이 통통하게 오른 볼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강 형사를 반갑게 맞았다. 송 마담은 한복과 기모노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옷을 입었다. 앞에서 보면 한복 같았지만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기모노였다. 강 형사는 송 마담의 인사를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정 중령 사건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대답하는 듯 마는 듯 손을 대충 흔들고 중앙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유진 기자가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강 형사는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담뱃불을 붙였다. 이유는 같았다. 평상시에 기자들에게 잘 보여야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 중령 사건 때문..

006. 의문의 죽음들 06 - 가룟 유다와 셀롯 시몬,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에

김유진 기자는 빡빡하게 잡힌 취재 일정을 앞당겨 끝마치고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숙제를 꺼냈다. 임일수가 김 기자에게 보낸 서류봉투였다. 봉투는 쉽게 열어 볼 수 없도록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 물에 빠져도 젖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다. 그는 문구용 칼로 서류봉투 위쪽을 쓱 그었다. 봉투에는 묵직한 원고 뭉치와 판화 그림 134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도 동봉됐다. 겉면에는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에는 비밀을 지켜 달라.’는 글씨가 쓰였다. 그가 임일수에게 했던 말이었다. 김 기자는 서류봉투를 들고 청다방으로 향했다. 사무실을 유영하며 기자들을 감시하는 사회부장의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방 안은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도 별로 없고 분위기마저 칙칙했다. 카운터 옆, 댓돌을 붙여 만든 화단에 ..

005. 의문의 죽음들 05 - 비밀수사, 다시 처음부터

취조실 알전등이 환하게 켜졌다. 가운데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였고, 한쪽 벽면에는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창이 널찍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이곳에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강동일 형사도 젊었을 때 취조실 눅눅한 마룻바닥에서 물에 흥건하게 젖은 채 깨어난 적이 있었다. 최루제로 뒤범벅이 돼 잡혀와 흠씬 두들겨 맞은 뒤였다. 공안 당국은 그에게 더 이상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형무소와 해병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강 형사는 해병대에서 3년을 야인처럼 보내다 제대한 뒤 학업을 중단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더 이상 공부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육 개월을 핑핑 놀다 경찰공무원이 됐다. 경찰에 대한 존경심은 없었다. 경찰이 되면 공안경찰, 폭력경찰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일조해 보겠다는 ..

004. 의문의 죽음들 04 - 2025년을 위하여, 죽인 자가 남긴 메모

1975년 8월 23일. 경찰청 안은 음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삼일 전 일어난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해결사’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던 강력계 강동일 형사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피살된 사람은 정상일 중령(보안사 수사과장)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범인이 갈긴 것으로 보이는 메모만 유일했다. 부검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현장에서는 어떠한 살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강 형사는 사건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이틀 동안 범인이 남긴 짤막한 메모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정 중령 사체의 머리맡에 덩그러니 적힌 글씨는 ‘2025년을 위하여’였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색에 잠겼다. ‘2025년이라면 50년 뒤라는 얘긴데, 무슨 뜻일까?’ 강 형사는 50년 후면 아흔 살이었다. 쭈글쭈글한 얼굴로 죽을 날만 기..

003. 의문의 죽음들 03 - 임일수, 베일에 싸인 사내

김유진 기자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근지근했다. 차라리 감기에 걸려 드러누웠으면 좋겠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간첩 색출을 알리는 소식을 머리기사로 내라는 사회부장의 닦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태의연한 간첩 조작 사건에도 신물 났지만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지 못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엄혹한 시절에 별일 당하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들이 사라졌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됐다. 동베를린 간첩단이 그러했고, 유럽 거점 간첩단이 그러했으며,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이 그러했다. 또 민청학련 같은 사건으로 1천여 명이 구금당했고,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도 벌어졌..

002. 의문의 죽음들 02 - 비밀회동, 장준하 죽음 하루 뒤

소총을 든 군인들이 효자동 삼거리 한가운데 간이 막사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경계를 섰다. 무궁화 공원 앞에는 검은 양복을 쑥쑥 빼입은 경호원들이 청와대 출입차량을 검문했다. 경호원들은 차량뿐만 아니라 효자동 인근을 거니는 일반인들도 불러 세웠다. 검문은 형식적이지 않았다. 안면이 있거나 용무가 확실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몸을 더듬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얼굴도 여러 번 대조했고, 가방 안에 든 물건도 꼼꼼히 살핀 뒤 통과시켰다. 지난해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 이후 검문검색이 강화된 탓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효자동 인근을 지나갈 때면 검문을 피해 일부러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어떤 꼬투리를 잡혀 고초를 치를지 몰랐다. 검문소 앞에 안테나를 구부러뜨린 군용 지프차 세 대가 연달아 나타났다..

001. 의문의 죽음들 01 - 류노스케의 밀실, 비열한 일족

예리한 칼로 도려낸 종이들이 책상 위에 널렸다. 천박한 문양의 욱일승천기와 누렇게 바랜 일본 군가 악보, 일본 천황의 작위를 받는 조선인 사진도 주절주절했다. 제일 위에 놓인 것은 작은 활자가 빼곡히 들어찬 신문 쪼가리였다. 쪼가리 오른쪽 모퉁이에는 붉은 사인펜으로 눌러쓴 별표가 유난히 선명했다. 한신일보 김유진 기자의 기사였다. 류노스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1975년 8월 18일자 헤드라인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긴급조치 석방 8개월 만에 장준하 실족사’ ‘함석헌 등 각계 재야 지도자들 장례식장 줄이어’ ‘산행의 달인이 왜 벼랑으로? 타살 의혹 제기도’ 류노스케의 뺨은 뼈만 남은 듯 핼쑥했지만 며칠 잠을 못 잤는지 피부가 부숭부숭 부어올랐다. 솜털이 송송히 돋은 목덜미는 발그레했다. 손가락으로 ..

한 판, 한 판 숨을 몰아쉬며 - 못난 선배가 되지 말자

한창 국정교과서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그 무렵, 아마도 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른다. 우연히 들른 동네서점에서 집어든 이 「돌베개」 책은, 세월호 사건 이후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나에게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고, 한 번 읽고 책장을 그대로 덮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엔 온통 진흙 밭을 뒹구는 장면, 타는 목마름, 목숨을 건 행군 그리고 벅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로 가득 찼고. 그 동안 무심했던 지난 역사의 아픈 상처가 지금도 채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연필을 쥐고, 조각칼을 잡고, 나무를 어루만졌다. 한 판, 한 판 숨을 몰아쉬며 걷기 시작했다. 아니 함께 철조망을 뛰어 넘고, ..

스토리

1975년 8월 20일 정상일 중령(보안사령부 수사과장, 현 기무사)이 죽는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한 지 3일 만이다. 이 사건은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자살로 종결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정 중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부검소견서를 낸다. 강동일 형사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정 중령의 수사를 방해하자 그의 죽음 뒤에 어떤 비밀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정 중령의 애인 소영은 강동일 형사를 은밀히 만나 정 중령이 윗선에서 지시한 특수한 임무 때문에 죽기 일주일 전부터 무척 괴로워했으며, 그 임무가 아마도 장준하 선생과 관련된 것 같다고 추측한다. 그날 밤 소영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장준하 선생과 정 중령의 잇단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정 중..

왜 지금 장준하인가? - 기무사에 칼끝을 대다

예정된 목표를 쉽게 변경해 본 적이 없었다. 안일하게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서였고, 말만 앞세우는 목표는 결과가 초라해서였다. 「칼로 새긴 장준하」는 정말 목표에 없는 집필이었다. 막걸리가 술술 들어가자 덜컥 장문의 글을 쓰겠다고 해버렸다.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대충 따져 봐도 원고지 1,000매가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시중에 풀린 장준하 선생 관련 책과 비교될 것도 뻔했다. 다음날 숙취 때문에 골이 쑤실 때 술집이 떠나갈 듯 외쳤던 결의가 생각났다.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발등을 찍고 싶었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20대부터 컴퓨터 테크니컬 라이터로 책을 냈고, 대기업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글을 쓰며 「방랑」이라는 책자를 계속 발간했고, 10년 넘게..

칼로 새긴 장준하 - 2019년 세종도서

「칼로 새긴 장준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적시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도록 도왔다. 다소 무겁고 재미가 떨어질 수 있지만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사색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기 위해 다큐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칼로 새긴 장준하」에서 장준하 일대기 부분은 장준하 선생이 직접 쓴 「돌베개」를 참조했다. 그러나 모든 감정 표현과 상황 설명, 일부 등장인물 또한 창작해 반영한 허구임을 밝힌다. 이 책이 만약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돌베개」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눈곱만큼도 「돌베개」를 따라갈 수 없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칼로 새긴 장준하」에 실린 판화는 「돌베개」의 내용을 100% 재현한 진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6천리 항일대장정을 따라가며 한 땀 한 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