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09. 의문의 죽음들 09 - 달걀로 바위 치기, 자살할 이유

이동권 2023. 7. 21. 17:42

‘상기 피해자의 부검 결과(중략) 사망 원인은 상행대동맥 자상으로 본다. 문구용 칼로 목을 그어 절명했다. 문구용 칼에서는 피해자의 지문만 발견됐으며, 목을 벤 칼의 각도를 봐서는 오른손으로 실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이외에 다른 신체 부위에는 어떠한 외상도 없다.’  


강동일 형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건 끝났네. 종결이야.”


“강 형사. 현장 사진 봤잖아. 칼로 목이 베였는데 바닥에 피가 한 방울도 없었어. 이수미 경위는 이미 죽은 사람을 칼로 베서 그런 거라고 추론하던데, 국과수는 자살이라고 결론 내 버렸네. 납득이 가지 않아. 목을 매거나, 팔목에 칼을 대거나, 독극물을 마시거나, 분신하거나, 절벽에서 투신할 수 있지만 자기 목을 스스로 베기는 쉽지 않단 말이지.”


“그렇긴 한데, 어떻게 할 거야. 국과수가 자살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법의학자도 아니고. 만약 어마어마한 권력이 뒤에 있다면 달걀로 바위 치기야. 우린 할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정 중령의 자식들이 일본에 있다고 했지. 홀아비라 아내는 없고. 보안사에서 부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젠 통지해도 되지 않을까. 가족의 동의 없이 부검한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자식들이 자살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새로 검시나 부검을 요청하겠지.”


“이렇게 치정 자살극으로 끝나는 건가?”


김 형사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치정이라니?”


“부검 결과 기다리다 시간이 나서 정 중령의 집에 갔는데 일기장을 발견했어. 일기에 애인 얘기가 나오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소영인가. 최근에 둘이 좀 다퉜더라고. 친구들 얘기도 술에 취해서 밤늦게까지 신세타령을 했다 그러고.”


강 형사는 소영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청다방에서 쪽지를 건네준 종업원이 소영이었다.


“이유가 없으니 이유를 만드는 거겠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진 말라고. 자기 일 아니면 모두 가십거리일 뿐이야. 이제 임일수만 족치면 되겠네.”


강 형사는 김 형사의 말에 호응하지 않은 척했다. 수사가 너무 손쉽게 정리되자 갑자기 허탈함이 밀려온다는 너스레도 떨었다. 그는 김 형사에게 소영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김 형사를 정 중령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 형사는 갑자기 배가 아팠다. 정 중령과 관련된 얘기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임일수의 책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린 뒤 덩그러니 매달린 물건을 바라보면서 양변기에 앉았다. 


그에게는 임일수가 최고 골칫거리였다. 소영을 만나면 정 중령 사건의 엉클어진 실타래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었다. 반면 임일수는 답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입을 열게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마초를 폈다고 감옥에 무작정 가둬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구입 경로를 알아내 수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강 형사는 임일수의 소설을 읽다 보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는 담배를 꼬나물고 소설 「비밀조직」을 읽어 나갔다.


「비밀조직」은 구한말 일본에 조선을 팔아먹은 친일파 후손들과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교포들로 조직된 단체 이야기였다. 이 조직이 다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협잡을 꾸미는 것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였다. 강 형사는 소설을 읽으면서 분노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청년들은 존경스러웠지만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이 땅과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행위는 명치끝 분노까지 스멀스멀 솟게 했다. 강 형사는 실제로 비밀조직이 존재한다면 어떠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슴이 꽉 막히면서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 왔다. 


비밀조직이 없으란 법은 없었다. 그는 프톨레미 바위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침투한 것들에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육을 지배당한다는 이집트 전설이었다. 프톨레미의 신전은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산에 세워졌다. 하지만 아스포텔이라는 하얀 꽃이 바위산에 피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일제 잔재도 비슷했다.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일제 잔재를 인식하고 청산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자멸을 초래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일본은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잘못된 과거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우경화됐다. 그럴수록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자성하고 일제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주류 기반으로 등용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대통령도 만주인맥을 대거 높은 자리에 올려 쓰면서 친일파들은 한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