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19. 장준하 일대기 06 - 이간질에 농락당하다

이동권 2023. 8. 9. 23:11

성공한 탈출 - 필담, 우리는 한국청년이오

장준하 일행이 끌려온 곳은 산속에 구축해 놓은 진지였다. 진지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게 보였다. 방공호는 넓고 깊었으며, 진지 주위는 흙을 넣어 만든 포대로 에워쌌다. 진지로 가는 길목에는 적의 염탐이나 기습을 막기 위해 몇 겹으로 경비병이 배치됐다. 경비병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고 몸수색을 한 뒤 수신호를 나누며 길을 열었다. 


장준하는 대장이 기거하는 집무실로 끌려가 앉았다. 집무실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자신의 의사가 정확히 전달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목숨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리라 마음먹었다. 집무실에 유격대 대장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얼굴은 엄숙하고 온화했으며, 굉장히 내성적인 성품의 소유자 같았다. 장준하는 그를 보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붓을 들었다. 자신들은 한국 청년이며,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해 독립운동을 하러 임시정부로 가길 원한다는 의지를 종이 위에 썼다. 남자는 장준하가 쓴 글을 읽고 자신을 중앙군 소속 유격대 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하는 것처럼 음식물이 전달됐고, 편안한 휴식이 주어졌다. 장준하 일행이 절체절명의 궁지에서 벗어나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장준하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주섬주섬 집어먹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회한은 숨길 수 없었다. 도망치는 길에 놓쳐버린 김영록이었다. 총탄을 피해 홀로 피신했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어느 길목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이별은 슬펐다. 특히 죽음과 함께 겪게 되는 이별은 가장 슬펐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이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자체가 그리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격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줬다. 장준하는 대장을 찾아가 김영록과 헤어진 사연을 설명한 뒤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대장은 그를 발견하면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장준하 일행을 사령부로 보낼 차비를 했다. 사령부에는 장준하처럼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들과 애국의 큰 뜻을 품고 항일전에 나선 한국 청년들이 몇몇 있었다. 


장준하는 김영록을 만나지 못하고 여기서 이대로 떠나야 된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 시키는 대로 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쓰카다 부대 최초 탈출 학도병 - 평생동지 김준엽을 만나다

진지에서 십여 명이 차출됐다. 장준하 일행을 중앙군 사령부로 이송할 중국군이었다. 그들은 멀고 험한 길을 차비했다. 어깨에 총을 메고 주머니에는 삶은 달걀을 챙겼다. 신발 끈은 단단히 동여맸고, 느슨한 허리춤은 추겨 올렸다. 사령부는 생각보다 멀었다. 20리 길을 걸어야 했다. 


길은 평탄치 않았다. 오솔길을 지나 지름길로 접어들자 불규칙하고 울퉁불퉁 굴곡진 길이 계속 이어졌다. 장준하 일행은 걷는 내내 김영록이 걱정돼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이 길을 그와 함께 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이라도 그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기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추격을 피해 달려왔던 피로도 밀려왔다. 발가락은 붓고 다리는 뻣뻣해졌다. 중국군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눈여겨보지 않아도 표정에서 읽혔다.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온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사령부는 유격대 진지보다 크고 넓었다. 군부대 막사가 일렬로 10여 채 넘게 펼쳐졌고, 막사 중간중간마다 속옷이나 수건 따위의 빨래가 널려 바람에 나부꼈다. 따로 식량을 쌓아놓은 막사도 눈에 띄었고, 화장실로 보이는 곳에는 하루살이와 파리가 허공을 뱅뱅 맴돌았다. 마당에는 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눴다. 모포를 깔아놓고 곯아떨어진 병사도 있었다. 


장준하 일행이 사령부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있을 때 중국 군복을 입은 청년이 나타나 일행을 반겼다.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며 일행을 차례차례 안았다. 그의 이름은 김준엽이었다. 장준하는 사령부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자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을 느꼈다. 유격대 진지에 있을 때만 해도 탈출에 성공한 기쁨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만주 벌판에서 동포를 만난 환희와는 비교되지 않았다. 


김준엽은 평북 강계 출생으로 쓰카다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한 학도병이었다. 해방 후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다. 총장 재직시절 군부독재정권과 대립하다 1985년 강제로 사임했다. 


막사 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소등하고 취침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사 안은 호롱불이 켜져 있었다. 대낮처럼 밝진 않았으나 얼굴에 난 점까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장준하 일행이 막사에 마련된 침대에 앉자 음식이 들어왔다. 

다시 만난 희열 - 김영록 동지와의 재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이 나왔다. 장준하 일행은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을 먹으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강보리밥 한 그릇과 달걀프라이, 시래기를 볶아 끓인 국이었지만 여느 산해진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났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오로지 김영록이었다. 만약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장준하는 나룻배 뱃머리를 돌려 그를 끝까지 기다렸다면 지금과 같은 괴로움은 겪지 않았을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막사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장준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 수선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에 크나큰 절망감을 안겼던 김영록의 목소리였다. 그는 맨발로 뛰어나가 김영록을 왈칵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홍석훈, 윤경빈도 뒤따라 뛰어나와 두 팔을 열어젖히고 서로를 보듬었다. 그를 챙기지 못한 세 사람의 사죄와 네 사람이 다시 만난 희열이 뒤엉킨 순간이었다.

 

김영록은 총탄을 피해 수수밭에 엎드려 있다 중국군 수색대에게 발견돼 사령부로 오게 됐다. 장준하 일행은 잠을 못 이루고 서로의 무용담을 나눴다. 장준하는 김영록을 잃은 괴로움 때문에 한 시간이 일 년 같았다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김영록은 아무렇지 않게 세 동지를 달랬다. 자신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들을 위로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다시 수심을 안겨준 건 김준엽이었다. 그는 장준하 일행에게 오늘밤 사령부를 떠나 고왕탄광에서 일본인들에게 혹사당하는 중국인들을 돕는 일에 사령관의 통역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알렸다. 


일본은 점령지역의 중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연인원 1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을 징용해 대규모 군사 시설을 건립했고, 대륙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약탈하는데 이용했다. 중국 징용자들은 중국 본토를 비롯해 일본, 동남아의 일본점령지, 조선 등지로 끌려가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강제노역을 가장 심하게 당한 건 한국인이었다. 일본은 한일합병 후 한국인들을 노동자로 강제 징용했다. 그 숫자는 무려 800만 명에 달했으며, 대부분 무임금으로 착취당했다. 조선인들은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가거나 군속으로 차출돼 일본이 침략한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군사기지 건설, 철도공사 현장에 투입됐다. 일제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전쟁 중 희생됐다. 

독살스러운 일본군 - 절망의 서

장준하는 김준엽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아니라 일본인과의 협상테이블에 통역으로 참여하게 돼 다행스러웠다. 설사 중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해 탄광 지역을 탈환한다고 해도 일이 잘못돼 김준엽이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김준엽은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 후 가장 처음 만난 한국인이자 낯선 중국군 진영에서 같은 민족의 따뜻함을 느끼도록 보살펴 준 사람이었다. 그 고마움과 살가움은 어떤 금은보화로도 갚을 수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걱정 섞인 눈으로 김준엽을 바라보면서 꼭 다시 만나자는 말로 아끼는 마음을 전했다. 일행은 반드시 살아올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으나 한 치 앞의 일은 어느 누구도 몰랐다. 그는 장준하 일행에게 늦어도 내일 오후에는 돌아올 것이라고 안심시킨 뒤 막사를 나섰다.


김준엽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은 혹시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 편안한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청해도 좌불안석이었다. 서로 간의 대화도 뜸해졌고 탈출의 기쁨도 점점 잃었다. 
사령관 일행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장준하 일행에도 전해졌다. 장준하는 막사에서 뛰어나와 김준엽을 안았다. 김준엽은 여전히 정중하고 상냥한 태도로 그를 대했지만 표정은 언짢아 보였다. 눈빛을 밑으로 내리깔며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장준하는 근심이 가득 서린 그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뒤숭숭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김준엽은 일본군 수비대장이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편지는 일본군에 잡힌 중국군 포로 30명과 쓰카다 부대에서 탈영한 학도병들을 맞교환하자는 내용이었다.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 포로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장준하 일행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렸다. 입술이 실룩실룩 떨리고 움푹한 눈동자가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잘못하면 학도병 모두 쓰카다 부대로 넘겨질 수 있었다. 장준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었다면, 한국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본군의 으름장이었다. 그는 생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중국인과 한국인을 이간질시키는 일본군이 독살스러웠다. 이제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