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성영 화가 - 불모의 대지에 행복의 씨앗 심다

이동권 2022. 9. 25. 23:21

이성영 화가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그림이었다. ‘환상’ 같지만 ‘실체’가 무르익어 목을 길게 빼고 보게 만들었다. 임기응변 같은 재치나 비꼬는 말투가 대부분 재미를 주지만 때론 진실이 더 웃기는 경우가 있다. 이성영 작가의 그림이 그러하다. 한껏 분노를 토해내다 문득 발견하게 된 진실 앞에 발가벗겨지는 느낌. 그의 그림은 실소와 흥분이 되풀이되는 일상이다.


나는 그림에 대한 작가의 견해는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작가의 의도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크다. 하지만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깊은 인상을 받는 그림을 종종 발견한다. 설득력 있는 주제의식 못지않게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형상화했을 때다. 장황한 강의를 들을 때는 으레 잠이 오지만 친밀한 대화는 계속해도 즐겁지 않은가. 이 작가의 그림은 새록새록 또 다른 공상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온 듯하다.

평온한 숲속에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놓여 있다. 본질이 다른 두 매개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한 느낌이다. 육중한 탱크에는 연분홍 꽃망울이 구멍을 냈다. 참혹한 전쟁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연상되는 그림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잘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 한 캔버스 안에서 서로 이야기를 건넨다. 참으로 뜨겁고 어지러운 광경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사회의 갈등이나 모순, 권력이나 권위를 희화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상에서의 제 모습을 보게 됐죠. 그것은 다름 아닌 기계가 저에게 주는 소중함이었습니다. 작업실에는 화목(火木)을 때는데, 이 나무를 하는 시간이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더 길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엔진톱’이라는 놈을 만나게 됐고, 그놈이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갈등적 요소가 되는 기계인데 말이죠.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그 사이에서 발견하게 된 조화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갈등과 조화를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조화’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의 의중을 물었다.


“동일시까지는 아니지만 필연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화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갈등이 조화로 가기까지는 너무도 처절합니다. 제 그림은 과정의 처절함 보다 조화의 아름다움에 더 주목돼 있습니다.”

이성영 작가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일상에서 찾는다. 가장 ‘솔직하다’는 이유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대부분 그림 그리는 일에서 파생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모든 시간을 작업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가끔씩 작업을 하면서 초조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작가로서의 욕심 혹은, 더 나은 것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지지를 받기 전까지는 변함없이 찾아올 혹독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물질적 빈곤함은 생각보다 이겨내기 쉽습니다. 그게 내성이 생기면 그렇게 됩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작업입니다. 물론 재료가 다 떨어졌을 때는 그 재료가 가장 절실하지만요.”


그는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의무를 다 하겠다”고 말했다. 화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반영하고 주관적으로 표현할 의무가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는 “희망을 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떤 섬광보다 강렬한 빛이 느껴지는 결심이다. 그의 희망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행복의 기준은 각기 다릅니다. 꼭 경제적 풍요만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추구 하는 삶의 의미를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찾아갈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