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31. 운암대첩

이동권 2021. 11. 15. 16:42

광주 톨게이트 앞에서 벌어진 전경과 시위대의 충돌

 

광주 시민과 학생 10만여 명은 금남로에서 5·18 광주항쟁 11주기를 기리고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태우 대통령을 형상화한 허수아비 화형식을 거행하며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때 故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광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대들은 속속 광주 톨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5월 19일 새벽 4시 15분. 강경대 열사의 운구행렬이 광주 톨게이트에 멈춰 섰다. 전경 20개 중대 3천여 명이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례행렬의 광주 시내 진입을 막고 있었다. 광주 도청 앞 노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간.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선봉 깃발을 들고 곳곳에서 강경대 장례행렬의 진입을 돕기 위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돌과 쇠파이프로 맞섰고, 일부 학생들은 아파트 단지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 화염병과 돌을 던졌다. 경찰은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연발 최루탄을 마구 쏘면서 길을 터주지 않았다.


경찰은 대책회의에 도청 앞 노제를 포기하고 곧장 광주 망월동 묘지로 직행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서울 시청 노제에 이어 광주 도청 노제마저 포기할 수 없었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면서 유가족과 학생들은 차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이들은 서울에서부터 계속된 최루탄 공세와 수면부족을 겪고 또다시 기나긴 대치가 이어지자 기진맥진해졌다. 특히 식수와 먹을거리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광주항쟁 당시의 ‘광주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톨게이트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식수와 김밥을 잇달아 보급했다. 또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들의 도시락을 운반하던 트럭을 중간에서 붙잡아 도시락 박스를 길바닥에 쏟아놓고 짓밟아버렸다.


오전 9시가 되자 시위대는 최초 충돌지점으로부터 500미터 가량 전진했다. 이때부터는 당시 공사가 한창이었던 광주문화예술회관의 건축자재로 무장하고 경찰들과 정면으로 육탄전과 투석전을 벌였다.


좀처럼 길이 뚫리지 않고 부상자가 속출하자 유가족과 장례위 측은 광주 도청 앞 노제를 포기하고 망월동 묘역으로 직행하겠다고 광주 시민들을 설득했다. 노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신 훼손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래서 오후 2시경에는 선두차 일부가 망월동으로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광주전남대책회의에서도 서너 시간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유족들은 하는 수 없이 출발을 포기하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때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4월 29일 분신했던 박승희가 병상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운암동으로 대거 몰려와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대에는 광주시내 고등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시위대는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나가길 반복하며 투석전을 계속 펼쳤다. 그럴수록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은 계속 불을 뿜었다. 이 과정에서 페퍼포그가 전복되고 전소됐다. 시위대는 페퍼포그 조정수가 죽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육탄전도 벌어졌다. 시위대들은 경찰 36명을 붙잡아 무장해제를 시키고 인근 서강 전문대로 끌고 가 감금했다. 하지만 격렬한 시위대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길은 뚫리지 않았다. 


오후 3시경이 되자 시위대는 드디어 어린이 대공원 뒷산과 중외공원 쪽의 경찰 저지선을 뚫고 본진과 합류해 앞과 뒤에서 협공을 시작했다. 전경들을 두 차례 거세게 몰아붙였다.


시위대는 잠시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꾀를 냈다. 어떻게든 도청에서 노제를 지내야한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시위대는 경찰 몰래 장례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500m 떨어진 고속도로변의 가드레일을 20m 뜯어내고, 폭 70cm, 길이 1m의 배수구를 돌멩이와 중앙분리대 철체 난간으로 채웠다. 길을 가로막고 있던 전나무도 뽑아버렸다.


샛길을 만든 시위대는 7시 30분경 운구행렬을 감쪽같이 빼돌렸다. 15시간에 걸친 대치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톨게이트 입구만 지키고 있어서 이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또한 저녁 7시 20분경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며 몰아붙이는 통에 시야가 가려 장례행렬이 옆으로 빠지는 것도 전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광주 시민·학생들이 길을 뚫어주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힘을 느꼈다. 경대가 부활한 느낌이었다. 이날 운동권에 대한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운동권 학생은 왜 공부도 하지 않고 거리에 나오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경대를 잃고,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 정의로운 사람들인 것 같았다.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운동을 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더 이상의 죽음은 막고 싶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었다. 


운구행렬은 도청 앞까지는 가지 못하고 바로 앞 금남로 사거리까지 진입했다. 그리고 겹겹으로 쳐진 경찰의 저지선 속에서 밤 9시 50분경 노제가 시작됐다. 이때 몰려온 추모인파만 10만 명. 이때도 광주 시민들은 김밥과 빵, 음료수, 담배를 들고 나와 서로 나눠주며 격려했다. 


유가족들은 18시간 만에 성대한 노제를 치르자 눈물이 북받쳤다. 


아버지는 무대에 올라 감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슬프지 않습니다. 백만 학도들이 모두 내 아들, 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위해서 끝까지 싸웁시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노제 중간에 최루탄 가스가 날아들어왔다. 일부에서 경찰이 노제를 방해하기 위해 최루가스를 날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극도로 흥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모아놓고 불을 지르며 ‘노태우 정권 퇴진, 민자당 해체, 미국반대’를 외쳤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노제가 끝나고 학생과 시민 5천여 명은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다. 이들은 자전거, 오토바이, 자가용, 택시, 트럭 할 것 없이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어서 걷는 이들도 많았다. 명지대 학생들도 만장을 들고 망월동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도로에 있던 사람들은 장례행렬을 향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트럭에는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아저씨, 아주머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세대를 초월한 사람들이 올라탔다. 이들은 망월동으로 향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의 노래’를 합창했다. 마치 광주항쟁이 다시 되살아난 듯이 희열에 넘친 모습이었다.


“이제야 광주항쟁의 정신이 되살아났다.”
“광주여. 경대를 품고 날아올라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과 시민들
광주 톨게이트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학생들
광주 시민들에게 잡혀 무장해제 당한 전경들
故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감쪽같이 빠져나가자 전경들이 장례 버스들의 유리창을 모두 부셨다.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던 광주 운암동 대로
장례행렬이 빠져나갈 무렵의 광주 톨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