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28. 결사항전의 다짐

이동권 2021. 11. 15. 16:16

1991년 4월 29일 연세대학교

 

4월 27일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여 강경대 사망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고, 신촌 로터리까지 행진하기 위해 교문 앞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전경들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를 막았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애초 이날 싸움은 명지대 학생들이 주도했다. 명지대 학생들은 명지대 교문에서 연세대까지 평화행진을 진행한 뒤, 전대협이 주최한 이날 집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제일은행 사거리에서 막고 길을 내주지 않자 학생들은 그 자리에 앉아 농성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좌 농성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나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학생들은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위협을 해도 도망가지 않고 꿋꿋하게 맞섰다. 당황한 전경들은 앉아있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 노골적으로 최루탄 봉지를 털었다. 


학생들의 머리와 몸은 금새 최루탄 가루로 하얗게 뒤덮였다. 그래도 학생들은 비켜나지 않았다. 경대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일관하는 경찰의 잔인함에 치를 떨 뿐이었다. 


결국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모래내를 지나 연세대까지 평화행진을 진행했다. 


이날 전국 대학에서도 강경대의 죽음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일제히 열렸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기습시위를 벌였다. 


또한 각 대학 구내에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경찰의 폭력을 비난하는 대자보도 줄지어 나붙기 시작했고, 노태우 정권 퇴진의 정당성을 알리는 선전전도 곳곳에서 펼쳐졌다.


강경대 사건의 파장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이었다. 그의 분신은 경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들을 울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경대의 죽음이 5월 투쟁의 포문을 여는 기폭제가 됐다면 승희의 분신은 5월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승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충격에 빠졌다. 경대가 죽은 뒤 슬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무작정 경대를 따라가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승희가 분신한 뒤에는 투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온 국민의 슬픔과 애도를 지켜보면서 ‘경대가 나만의 아들이 아니라 온 국민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고, 학생들과 함께 끝까지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4월 29일 학생들은 범국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속속 연세대 운동장으로 모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학생들은 비폭력 투쟁이라는 시위 기조에 따라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고 맨몸으로 전경들과 맞붙어 길을 뚫었다. 


전경들은 비닐봉지에 최루탄 가루를 담아 학생들의 머리 위로 뿌리고, 사과탄을 분해해서 학생들 사이로 밀어 넣기도 했다. 


학생들은 최루탄 가루가 피부에 닿아 쓰라리고, 살갗이 부풀어 올라 터져 진물이 흘러내렸지만 물러나지 않고 몸싸움을 벌였다. 강경대의 죽음에 이어 박승희의 분신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더욱더 격양된 목소리로 ‘노태우 정권 타도’와 ‘전경·백골단의 즉각 해체’를 외치며 격렬하게 싸웠다.


대학생 5만여 명은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연세대 운동장에 집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조명 차량의 집입을 막고 집회를 방해했다. 범국민대회는 할 수 없이 승용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조명삼아 진행됐다. 


아버지는 단상에 올라 결연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나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아들이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선미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비극적인 시대에 대학을 다니는 저에게 있어 동생 경대는 친구이자 동지였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난 동생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투쟁을 벌여나가겠습니다.”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시청 앞까지 평화대행진을 벌이기 위해 교문 밖으로 나섰다. 


먼저 나간 대열은 신촌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경찰은 대열의 중간을 끊고 연세대 안으로 다연발 최루탄을 쏘고, 물대포 2대를 동원해 행진을 저지했다. 


연세대 진입로를 가득 메운 학생들은 최루탄 가루를 피해 교내로 급히 돌아왔다. 그리고 대열을 정비한 뒤 악에 바친 얼굴로 다시 나타나 전경들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문은 쉽게 뚫리지 않았고, 학생들은 집회를 정리한 뒤 다음 싸움을 준비했다.


먼저 교문을 빠져 나간 학생들과 뒤늦게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신촌 일대와 서대문 로터리, 아현동, 서울역, 명동 일대 등 도심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연세대에서 밤샘농성 중인 학생들은 학교별로 학생회관, 동아리방 등에 숙소를 배정받고, 규찰근무 순번을 정해 경계를 서면서 장기농성 태세에 들어갔다.


대책회의는 책임자 처벌과 백골단 해체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과 국민애도 기간인 5월 4일까지 ‘전 국민 검은 리본 달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발표했다. 또 4일을 ‘백골단 해체의 날’로 정하고 백골단 소속대원들의 폭력적인 시위진압 거부와 양심선언 등을 촉구했다.

 

1991년 4월 29일 연세대학교
1991년 4월 29일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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