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12. 세상을 보는 눈을 뜨다

이동권 2021. 11. 15. 15:00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후 경대가 주선해서 간 첫 MT

 

강경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5·18광주항쟁5)을 알았다. 슬프고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 경대는 충격을 받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웅숭깊은 생각을 했다. 


그 중심에는 오만스러운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주위에 냉담의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미웠고, 만약 모두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냉혹해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경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싸웠던 이들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조그마한 것도 마음을 드러내 놓고 헌신할 때에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경대가 5·18광주항쟁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광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광주로 내려가 친구를 만났다. 실성한 듯 보이는 40대 여인이 검정 고무신을 들고 땅을 치면서 “내 자식을 살려내라”며 통곡하는 모습을 광주터미널에서 목격한 뒤였다.


“5·18을 기록한 영상이 있으면 줘봐.”


친구는 신문지로 둘둘 말은 비디오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건네며 말했다. 


“이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무조건 감옥에 가니까 조심해.”


그때는 광주에서 데모했던 사람들은 모두 ‘폭도’ 아니면 ‘간첩’으로 몰리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와 이 비디오를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경대에게 말했다. 


“아빠 고향이 전라도 광주란다. 5·18광주항쟁이 있었던 곳이지. 군사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죄 없는 광주 시민들을 무참하게 죽인 나쁜 놈이 바로 전두환이야. 꼭 기억해야 한다.”


경대는 이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지, 불의에 저항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게 됐다. 또 사회 문제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점점 변해가는 경대를 보면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보통 광주 사람들은 노태우를 ‘나쁜 놈’, 전두환을 ‘죽일 놈’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그렇게 얘기한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듣고 배워서다. 경대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 사회에 불만을 갖고 과도하게 비판하다가 그릇된 방향으로 꼬이거나 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경대야.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러니. 아빠가 돈 잘 벌고, 너는 학교에 잘 다니면 되지.”
“엄마. 사람들의 아픔을 등한시하면 안 돼요. 그러면 사회가 삭막해지고 점점 더 나쁘게 변할 거예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수록 사회가 좋아질 거예요.”


경대는 어머니를 훈계하듯 말했다. 


어머니는 경대의 반응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한 채 얼버무렸다. 괜한 걱정을 한 듯해서다. 심성이 바르고 대찬 경대를 치켜세우지 못할망정 걱정거리로 생각했다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경대가 전교조6)선생님을 믿고 따랐던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경대는 정의롭고 올바른 선생님들을 존경했다. 그래서 참교육을 꿈꾸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좋아했고,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경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전교조 투쟁이 정점에 다다를 때였다. 


경대는 언제부턴가 일요일만 되면 집에서 나갔다.


“엄마, 오늘 도시락 많이 싸주세요.”
“공부하러 가니?”
“아니오. 친구들하고 선생님 만나러 가요.”


어머니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도시락을 부족하지 않게 싸줬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들과 함께 전교조 교사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명동성당에 지지방문을 간 것이었다. 어머니는 경대를 잃고 난 뒤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광주에서 식당을 하고 있을 때 휘문고에서 해직됐던 음악교사가 찾아왔다.


“경대 어머니. 경대가 고등학교 다닐 때 명동성당으로 지지방문 왔던 거 아시죠?”
“금시초문인데요.”
“경대가 얘기를 안 했나 보네요. 일요일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힘을 주곤 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제가 걱정할까 봐 얘기를 하지 않았나 봐요.”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알았다. 아들 일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지만 경대의 심성(心性)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닌지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들은 이날 하룻밤 묵으면서 경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경대의 죽음을 개탄했다. 


“지지방문 왔을 때, 경대가 대학생이 된 고등학교 선배에게 ‘대학생들은 왜 데모를 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나네요. 그 선배는 ‘대학에 빨리 오길 바란다. 그러면 대학이 네게 그 답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대답했었죠. 그런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 경대는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선생님의 의견을 반박할 정도로 강단 있는 학생이었어요. 전교조를 비판하는 얘기만 나오면 참지 못했죠.”


어머니는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속 깊은 경대의 또 다른 마음을 알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네가 대학에 가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데모를 했던 것은 우연히 아니라 열망이었구나. 경대야. 엄마가 미안해.’

 

 

5) 5·18광주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민주주의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군인들을 동원해 총과 칼로 잔인하게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됐으며, 수구세력들은 광주항쟁을 북한의 사주로 일어난 빨갱이들의 폭동으로까지 매도했다. 광주항쟁 때, 사상자와 실종자를 모두 합쳐 총 2천여 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6) 1987년 일부 행동하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이념으로 하는 ‘참교육’을 천명하고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를 구성했다. 경쟁을 부추기며 입시에 몰입하는 교육 방식을 바꾸고, 군사독재정권이 교육을 체제유지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국교원노동조합의 복원을 시도했다. 교원노조는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2일 결성됐으나 박정희 정권 때 강제로 해산됐고, 법으로 교원과 공무원의 노동조합 결성이 금지된 바 있다. 사실 1987년 국회는 ‘6급 이하의 공무원은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이를 조직할 수 있고 단체교섭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교원노조 결성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로써 전교협은 노 정권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전교조는 1989년 5월 22일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창립식 직후 전투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고 교사 전원이 경찰에 연행됐으며, 당시 문교부는 전교조 조합원의 해직을 결정하고 교사 1,500여 명을 파면시켰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교육 대학살’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