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승윤 화가 - 반대는 항상 적절한 비율로 공존해야 한다

이동권 2022. 10. 11. 16:13

최승윤 화가


역동적이다. 무한한 에너지들이 밖으로 튕겨 나간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 조명들이 뒤엉켜 부서지는 색감처럼 가슴을 바짝바짝 태우며 뻗어나간다. 혼란한 세상일들이 겹겹이 쌓이고 어지럽게 중첩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외부의 어떤 압력에 포위된다. 대립되지 않는 일대의 조화에 감싸이고, 참고 버텨내고 이겨내는 힘에 저지된다. 숙련된 자세 그대로, 모든 시련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감내한다. 

최승윤 작가는 <정지의 시작>을 얘기한다. <정지의 시작>은 현상적으로만 보면 찰나의 순간을 표현한 의미 같다. 아니면 완벽하게 고요한 상태나 어떤 움직임이 급격한 충격에 멈춘 것 같다. 하지만 정지와 시작은 어딘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고 부적절한 조합이다. 정지와 시작, 두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판이하게 다르다. 시작은 방향성이 있고, 결과가 예측할 수 없어 전전긍긍한 것이다. 하찮은 일로 옥신각신하던 다툼이 차츰 커져 큰 싸움이 되는 불안이 내재돼 있다. 정지는 극렬한 반대나 첨예한 모순이, 감정적 반목이나 찬반양론의 대결이 정점에 달했거나 해소되는 느낌이다. 최승윤 작가가 얘기하는 <정지의 시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지의 시작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역설적인 말이다. 나는 세상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통 역설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상의 질서를 화면에 담기 위해 회화적 ‘움직임’과 ‘정지’의 느낌을 동시에 담으려 했다. 그림은 하나의 인간이나 사회, 세상과 같아서 일단 시작이 되면 자신이 영원할 것처럼 끊임없이 확장하며 생명력을 뽐낸다. 나는 이러한 그림의 움직임을 멈추려고 하고 비로소 그림이 멈추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법칙에 따라 그림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향해 꿈틀거린다.” 

삶의 예지는 예술가에게 귀중한 철학이다. 객관적 통찰이 과학의 생명이라면 주체적 통찰은 예술가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미덕이다. 제아무리 멋진 그림을 그려도 현실과 사회, 인간에 밀착하지 않은 그림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과 다르지 않다. 

세상을 역설로 읽고, 경청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미술로 풀어내는 최 작가의 솜씨가 인상적이다. 인간은 선과 악의 충동이 공존하는 모순된 존재지만, 거기에서 공존을 찾지 못하면 망가지고 만다. 이 부분은 설명이 조금은 필요하겠다. 자본주의처럼 풍요와 결핍이 공존하는 기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 작가가 말하는 역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부조리다. 그것의 근원은 바로 공존하는 방법을 찾지 않는 인간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대립하고 공존을 모색해야할 대상은 사회주의라 해야 맞다. 

“나는 항상 세상을 연구한다. 내 몸을 연구하기도 하고 사회현상을 면밀히 탐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 내 안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마치 정치판 같으며, 그렇게 세상이 보인다. 우리 몸만 보더라도 동맥과 정맥이 공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고, 세상은 물과 불 무엇 하나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정권교체는 자주 일어나면서 여당과 야당의 힘이 균형을 맞춰야 공정한 사회로 흘러간다. 이렇듯이 반대되는 개념이 공존해야지만 그것이 생명의 탄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뜻하다고 해서 불에 타죽는걸 원하는 게 아니고 시원하길 바란다고 해서 얼어 죽는 걸 원하진 않는다. 손쉬운 예로 샤워할 때 물 온도를 맞추는 것처럼 세상의 반대들은 항상 적절한 비율로 공존해야 한다.” 

평화가 깃들고 사랑이 발산되는 세상은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진 세상이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힘에 세상이 움직이면 언젠가는 균열을 일어나고, 그 힘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는다. 새도 좌우 양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화평하지만 항상 긴장되고, 한시도 경각심을 풀 수 없는 세상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다, 저 깊은 곳에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승윤 작가의 그림은 붓으로 그린 게 아니다. 최 작가는 자동차 와이퍼나 유리창닦개, 주걱, 플라스틱 같은 도구를 이용해 액션페인팅처럼 작업한다. 커다란 윤곽을 구상한 뒤 자연스럽게 터치하고 영역을 확장하면서 빈틈을 채워나간다. 액션페인팅은 결과보다 행위를 중시하는 회화로 물감이나 페인트를 떨어뜨리거나 뿌리며 화면을 구성하는 기법이다. 

“사실 붓을 배재하고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다. 지금도 붓을 사용하고 있고 붓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붓이 나를 얽매여 놓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림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그에 맞게 적절한 도구를 작가가 그림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붓이 아니라 다른 도구가 필요할 때 붓을 고집하는 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묶여있는 수준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가 무슨 도구를 사용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진 않다. 중요한 것은 필요할 때 적절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도구에 구애받지 않은 탓일까. 최 작가의 그림은 굉장히 중의적이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처럼 시원스럽지만 부서진 유리에 반사되는 불빛처럼 산란하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구현돼 순편하고 안정적이지만 정처 없이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처럼 즉흥적이고 도발적이다. 이러한 느낌은 그가 인위적으로 탈선을 억압한 것에서 기인한다. 여백과 물감의 농담, 비정형적인 억눌림, 색채의 절단으로 억제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이미지의 감동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내가 사회에 메시지를 전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듯이 세상사에도 흐름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나치시절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 독일인들은 거대한 역사적 기류에 휩쓸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질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도 붕괴했다. 세상의 영원한 패자는 없고 영원한 진리도 없다. 세상은 지금도 널뛰기를 하듯 흐름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나 한명이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사회적 발전상을 말하자면 우리는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균형은 인간의 가장 큰 본능이다. 추우면 옷을 껴입고 더우면 물을 찾는다. 우리 몸은 36도에서 37도 사이에서의 작은 변화는 괜찮지만 그 이상을 벗어나면 병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우리는 흐름을 유지하되 완만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흔들리는 시소가 평형을 이루는 때는 순간이지만 우리는 그 평행의 균형을 향해 항상 달려가야 한다. 역사적으로도 길게 보면 항상 균형이 맞춰지지만 그러한 굴곡의 패턴이 갈수록 짧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는 역설적이다. 가장 근본적이지만 피상적이기도 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철저하게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되레 인간의 기이하고 졸렬한 경이까지 포착한다. 최승윤 작가도 그런 점을 이해하는 것 같다.

“내 그림의 세계를 굉장히 잘 파악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현 시국을 이용해 그림을 해석하시는 관점을 봤을 때 굉장한 전율이 일었었다. 정치적 얘기를 하는 작가가 될 마음은 없지만 세상을 그리다보면 정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화합과 배반, 소통과 단절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그림도 일반인들과 먼 얘기가 아닌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 즐기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추상’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사실 잠깐 하늘의 구름을 보거나, 밤하늘의 별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추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