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라디오에서 방송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원고를 집필하는 이상락 소설가를 만났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는 2004년 10월 23일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상락 소설가는 1985년 장편소설 <난지도의 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창작집 <동냥치 별>, 장편소설 <누더기 시인의 사랑>, <광대 선언>, <고강동 사람들>, <차표 한 장>, <302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 소년소설 <누가 호루라기를 불어 줄까>, 콩트집 <지구는 가끔 독재자를 중심으로 돈다> 등이 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의 삶을 지배한다. 역사는 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 언어, 의식, 생활습관 등 거의 전 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간섭할 뿐만 아니라 특히 어떤 대국적(大局的)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 ‘해석된 역사’는 주요한 텍스트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는 힘이 세다. 이 ‘힘센’ 역사의 영향력을 알기에 제국주의로 위세를 부렸던 그 후예들은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왜곡하고 말살하려고 부단히 시도해왔다. 역사를 비틀어버리면 자연스럽게 나라도, 사람도, 문화도 바꿀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역사 왜곡은 가해 국가와 피해 국가,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이었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 내부의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더 심각하게, 혹은 더 유치하게 나타난다. 최근 정부는 사실(史實) 왜곡으로 논란이 된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결국 승인했다. 친일과 독재정권은 미화하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왜곡, 누락한 비틀린 역사를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교육’의 이름으로 배울 수도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다행히 해당 역사교과서를 수용한 학교의 수효가 미미해 한 시름 놓게 됐다지만, 그 왜곡된 역사책이 정부 당국의 검정을 통과해 교과서 시장에 당당히 진열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다.
망국의 설움을 잊은 민족, 일제에 영혼을 맡긴 친일 세력을 꾸짖던 단채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친일 세력에 대한 발본이 이뤄지지 못해 민족정기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친일 매국 세력의 후예들이 갖가지 명목으로 선대의 행적을 미화하고 포장해 그 기득권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역사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점도 걱정이다. TV에 나오는 대학생들, 연예인들을 보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입시에 맞춰 공부시키는 교육시스템이겠다. 역사를 모르면 어떻게 되는지, 역사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부터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상락 소설가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보다 “일부 노년층이 연장자의 위엄을 내세워 사회 진보를 퇴행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역사의식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년층
세뇌된 지식이 화석(化石)처럼 굳어져 요지부동
“내가 언젠가 청소년을 상대로 한 문학 관련 행사에 연사로 초대됐을 때 아이들과 이런 문답을 한 기억이 납니다. '선화공주의 이름은 뭐지?' '선화요.' '낙랑공주의 이름은?' '낙랑이오.' '그럼 평강공주의 이름은?' '평강이오.' 아이들의 대답이 모두 맞다면 내가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기본적으로 공주는 왕녀(王女), 곧 ‘왕의 딸’입니다. 물론 선화공주의 이름은 ‘선화’가 맞습니다. 그러나 낙랑공주의 이름은 낙랑이 아닙니다. ‘낙랑’은 그 공주의 아버지가 왕으로 지배하던 나라의 이름이지요. 이 공주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호동왕자와 함께 등장하는 설화를 기록하면서 ‘낙랑국 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낙랑공주라고 표기를 한 것이지요. 평강공주의 이름을 평강이라 부른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젭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25대 임금의 왕호는 평원(平原)인데 혹은 평강(平崗)이라고도 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 임금을 평원왕, 혹은 평강왕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평강공주’라고 할 때에는 ‘평강왕의 딸’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평강은 공주의 이름이 아니라 공주의 아버지인 임금의 시호이지요. 그런데 언젠가 역사 인물을 현대판으로 패러디해서 만들었다는 연속극에서 온달 역을 맡은 남자가 평강공주 역을 맡은 처녀를 향해서 '얘, 평강아!' 이렇게 부르는 모습이 나오던데, 그렇잖아도 당시에 처지가 궁했던 온달이 자신의 연인인 임금의 딸을 향해서, 그녀의 아버지인 평강왕의 시호를 들먹이며 무엄하게 '평강아!'라고 불렀다? 큰일 날 일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공주(公主)’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에서 나오는 아주 사소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평소에 평강공주의 이름이 평강인 줄 알고 있던 사람들 중 얼마라도 '아하, 그게 아니로구나. 평강은 공주의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인 임금의 시호였구나' 이렇게 깨닫고 금방 생각을 바로잡겠지요. 그런데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를, 이런 저런 정보를 통해서 깨닫고 수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십 대 청소년이나, 혹은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일까요, 아니면 칠팔십 대의 노인들일까요? 지금 ‘젊은이들의 역사의식이 걱정이다’라고 했지요? 우리 사회일반의 상식으로는 맞는 문제 제기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몰라서 문제야’, 혹은 ‘역사의식이 문제야’라고 할 때…이 걱정의 주체는 늘 나이 든 분들이고 걱정의 대상은 언제나 젊은이들인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역사의식이 심히 걱정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노년층입니다. 물론 요즘 청소년들이 유리의 역사에 관심이 덜하거나 입시에 매달린 나머지 역사 공부에 소홀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초·중·고 시절 역사책에서 배운 지식은 지극이 제한된 일부 지식에 불과합니다. 가령 요즘 어떤 유력한 인사가, 문제 있는 역사적 발언을 했을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하여 그것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통해 반박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등 활발하게 참여함으로써 모자랐던 역사 지식을 채우기도 하고 자신의 사관(史觀)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잘 발달한 정보통신 세상이 모름지기 평생학습의 장(場)이 되고 있는 셈이죠.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정보통신 세상에서의 비판에 견뎌내지 못하고 쪼그라든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학습을 했습니까. 문제는 나이든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나 인식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제도교육의 장에서 배운 역사지식에다 자신의 체험,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생성된 인식을 좀처럼 수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박정희’를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교실에 붙은 ‘혁명공약’을 외우면서 국민학교 생활을 시작했다가 군대 생활을 마친 뒤에야 ‘박정희’로부터 놓여났습니다. 그 20여 년 동안 대통령은 언제나 박정희였습니다. 그 20여 년 동안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는 철저히 통제된 채 일방적인 찬양만 난무했지요. 나이 든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기간에 세뇌된 지식이 화석(化石)처럼 굳어져서 요지부동입니다. 이제 와서 박정희가 일제의 군관학교를 나왔다느니 남로당의 간부였다느니 하는 얘기를 아무리 해봐야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 화석화된 역사 인식에 갇힌 일부 노년층이 연장자의 위엄을 내세워 사회 진보를 퇴행시키는 것, 이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저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걱정하는 편입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2004년 한국과 중국 간에 외교문제가 거세게 부딪쳤다. 중국의 ‘동북공정(동북변강사여현장계열연구공정.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때문이다.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간주하고,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견해를 펼쳤다. 한반도의 역사적 연고권을 확보해 남북통일의 문제에 개입하거나 동북지역에 대한 통일한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후 발생할지 모를 영토분쟁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맞서 정치, 외교, 학술, 교육 등 여러 부문의 전문가들이 대응책을 모색했다. 일반인들도 손발을 벗고 나섰다. 동북공정 저지활동을 벌인 ‘사이버의병(고구려지킴이)’이 대표적이다. 방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역할을 인식하고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고구려사의 정체(正體)를 다루는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극본은 이상락 소설가가 맡았다. 해박한 지식, 민족적 역사의식, 문학적 상상력, 드라마 구성력, 뚜렷한 현실인식 등을 두루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 소설가가 <역사를 찾아서>의 극본을 맡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1985년에 등단해 소설 쓰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등단하던 그해 말부터 KBS 라디오에서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물론 90년대 중반까지는 소설창작이 주(主)였고 방송극은 부(副)였는데 지금은, 수입구조로만 보면 라디오 다큐드라마 쓰는 일이 주업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는 문학판에 가서는 방송 집필이력을 내세운 적이 없고, 방송 쪽에서 프로필을 요구할 경우 소설을 써온 얘기를 한 줄도 끼워 넣지 않았다. 다시 정리해보면 방송국 측에서 <역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소설가이던’ 그에게 집필을 맡긴 것이 아니라, ‘20여 년의 방송작가 경력을 가진’ 그에게 그 다큐 프로그램을 맡긴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내세워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노골화하자,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등 위기감이 팽배해진 사회 분위기에서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사를 찬찬히 한 번 짚어보자, 이런 취지로 기획된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였습니다.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고구려사 전체를 편년순으로 모두 다루는 데에 꼬박 1년이 걸렸지요. 우리 고대사를 통사로 그렇게 세밀하게 다룬 프로그램이 이전엔 없었는데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을뿐더러 KBS가 지향하는 공영성에도 부합된다 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고구려사만 하고 끝내기엔 아깝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이어서 발해, 가야, 백제, 신라, 후삼국, 고려를 거쳐서 지금은 조선 세종대 중후반의 4군 6진 설치 과정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485편 ‘출정, 여진정벌!’ 중에서
- 극본:이상락, 연출:임종성
(해설) 세종 14년 12월 22일, 여진정벌을 앞둔 세종은 대신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합니다.
(세종) 과인이 생각하기에…동북의 야인으로 말하자면 본국의 경계와 연접되어 있어서 쉽게 분간하지 못할 터이므로 비록 끝까지 추격하여 야인들을 많이 죽이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나 서북의 야인으로 말하면 본국과 큰 강으로 둘러 막혔고, 국경의 분계가 명백할 뿐 아니라 또한 중국에 가까운데…과연 우리 마음대로 추격하여 잡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과인은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과인이 혹 뒷날에 황제에게 변명하여 대답할 것을 미리 준비코자 하였던 것이오.
(황희) 그 문제라면 이미 명나라 태종 황제가 성지를 내력서 밝힌 바 있사오니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세종) 과인도 경들의 이견을 따를 것이나…옛날 태종 황제의 성지가 서북 야인에게도 통할는지가 의문이오.
(황희) 주상전하, 똑같은 야인이온데, 어찌 동북야인, 서북야인이 다르겠사옵니까. 태종 황제가 내렸던 성지가 어찌 홀로 동북야인에게만 통하고 서북야인에게는 통하지 못할 리가 있겠사오며, 또한 어찌 옛날에는 통하던 것이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겠나이까. 청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시소서!
(해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지금 조선은 평안도의 여연과 강계지역을 침탈했던 야인, 즉 여진세력을 응징하는 전쟁을 준비 중입니다. 조선이 타격을 가하고자 하는 곳은 이만주가 우두머리로 있는 건주위인데요. 건주위의 본거지를 공격하자면 압록강을 건너가야 하지요. 그런데 지금 세종의 고민은, 동북면이라고 부르는 함경도의 북쪽지역이라면, 예전에 명나라의 태종 영락제가 영락 8년에 선지를 내려서 조선에 선유하기를 (생략)
<역사를 찾아서>는 맹목적으로 ‘고구려는 우리 역사’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중국의 왜곡된 고구려사를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고구려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이 고리타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해 ‘당시에 있었을 법한 일들’을 드라마로 쓰고, 성우들이 재현했다. 물론 역사적 사실성에도 충실했다.
“처음에 프로그램의 포맷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고민이 많았습니다.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나타난 기사들 중에 재미있는 대목만을 골라 라디오 드라마로 엮어낸다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역사의 정체(正體)를 탐색해보자는 기획의도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사서에 나타난 기사의 배경이나 그 상징하는 바를 분석적으로 기술하되 절대로 단정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지요. 또한 다루려고 하는 시기와 사안을 연구해온 전문연구자를 2인 이상 취재해 그 의견을 반영하되 논쟁적인 사안의 경우 양쪽 의견을 모두 소개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꾸렸습니다. 가령 우리 고대사의 경우 아직 규명되지 않았거나 견해가 대립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고씨일까 해씨일까, 고구려 제4대 임금의 왕호는 왜 태조왕이며 그가 120여 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백제의 시조는 비류인가 온조인가,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인가, 이른바 대륙백제설의 근거가 된 중국사서의 기록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삼국 중에서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하였다는 기록을 믿어야 하나…이런 논쟁적인 내용에 대하여 교과서의 경우 어느 한 가지 학설을 좇아서 기술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프로그램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모두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이점을 미덕으로 여기는 청취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프로그램의 흥미를 위하여 해설과 전공자들의 육성 인서트 이외에 어떤 대목은 성우들을 출연시켜 드라마 형식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사실(史實)을 왜곡하여 극을 꾸미거나 허황된 내용을 픽션으로 엮어서 주제를 흐리는 일은 철저히 지양하고, ‘있었을 법한’ 내용을 최소한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엮어 나가자, 이런 원칙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고대사의 경우 워낙 사료가 소략해서 작가의 상상력이 더러 필요했으나 지금 하고 있는 조선사는 왕조실록에 올라있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를 엮어낼 수도 있지요. 무엇보다 양적으로 우리 역사의 거의 전부를 꼼꼼히 짚어나가는 이런 프로그램이 이전에는 없었다는 점에서 누군가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을 저희가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조심스럽지만 이런 자부심은 갖고 있습니다.”
본업이 소설을 쓰는 일인 만큼 글 쓰는 일에도 집중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동일한 분량의 원고를 써내는 일,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만으로도 존경심부터 생긴다.
“아, 돌아보면 아득합니다. 제가 매주 써야 하는 원고 분량이 200자 원고지 120여 장 분량인데요,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가령 세종의 6진(六鎭) 설치 과정을 다룬다고 할 때 우선 세종실록에 나오는 해당 기사를 찾아 읽은 다음 그 분야에 대한 논문이나 서책들을 찾아서 읽고 나서 6진의 성격은 무엇인지, 여진족과의 갈등상황은 어떠했는지, 진(鎭) 설치를 두고 명나라와 외교적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진과 군읍을 설치해놓고 남쪽 지방에서 그 지역에 백성들을 사민(徙民; 강제이주)시킬 때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등등의 내용들을 인터뷰 자료로 정리해 섭외한 연구자들(주로 교수들)에게 전자우편으로 미리 보낸 다음, 녹음기를 들고 찾아가서 취재를 하고, 녹음 내용을 한글로 푼 다음, 참고 자료들을 모두 펼쳐놓고 다큐멘터리 극본으로 작성해 담당 피디에게 보내는 방식입니다. 물론 취재는 매주 하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취재한 내용을 3주 정도 활용합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이 어떻게 갔는지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더러는 여유를 부리기도 한답니다.”
<역사를 찾아서>가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침착하고 대담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긴 호흡으로 한국사를 전체를 관망하며 차근차근 짚어나가면서 두고두고 벌어질 역사 왜곡에 대비하려는 심사겠다.
청취자들의 반응은 말하면 잔소리다. 내용이 좋으면 열혈 팬들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이 소설가는 <역사를 찾아서>가 오랫동안 방송될 수 있었던 것도 청취자들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라고 공을 돌린다.
“이 프로그램을 지금까지 이끌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청취자들의 관심과 반응이 매우 컸지요. 더러는 게시판에다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고, 어떤 사안을 두고 저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면구스러울 정도로 칭찬이 넘쳐나서 큰 힘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 바로 전공 연구자들인데요, 고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어오면서 취재를 했던 전공학자들의 수가 연 350여 명이었습니다. 연인원이기 때문에, 가령 한 사람을 세 번 만난 경우 3명으로 집계한 수치이지요. 대개는 처음에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면 흔쾌히 응해주겠노라 약속을 하는데요, 막상 인터뷰 요지를 이메일을 통해 받고 나서는 “나 이거 못 하겠소”, 하는 경우가 꽤 자주 있습니다. 처음엔 그저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마음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다가 막상 인터뷰 요지를 받아놓고 보니 사전에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서 깜짝 놀란 것이지요. 제가 지리산 뱀사골 인근에 사는데 서울행 시외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내용이 까다로워서 오늘 인터뷰 못 하겠습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헛걸음을 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지요. 하지만 한 번 취재에 응하고 나면 적극적인 협조자가 됩니다. 학생들에게 다시 듣기 서비스를 통해서 듣고 난 뒤 리포트를 써오게 하는 등 수업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고,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겨서 그 분야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새로 썼노라고 고마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전공학자들 사이에 제가 ‘교수들 공부시키는 군기반장’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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