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는 맑은 눈을 가진, 나이 든 남자와 비슷하다. 고고한 자태, 지혜의 빛으로 넘치는 미소, 어떤 욕망에도 초연해 보이는 말솜씨가 국화에서 읽힌다. 국화는 강건한 인생의 상징이자 고결한 마음의 표상이다. 그래서 국화는 고인의 삶을 위로하는 추모의 의미로 쓰이고, 사람들은 만추가 되면 국화와 같은 마음으로 살길 바란다.
국화는 삶을 담아낸다. 계절의 종착점에 이르기 전, 가장 화려한 때 원숙과 겸손을 품었다. 봄에는 국화의 뽀송뽀송한 속살이 태동한다. 봄볕을 맘껏 구가하며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밀며 삶의 희열을 인식하고 탐욕의 업을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어리석음과 성냄에 이끌리고, 사랑과 욕망에 눈을 뜨며 꽃망울을 내민다. 그 욕망의 집착은 갖가지 벌레를 부르고 거칠게 잎을 키운다. 하지만 사나운 비바람에 씻김의 시간을 가진 뒤 자신을 정화한다. 국화는 가을이 되면 모든 업을 끊어내고 고행의 길에 들어서서 하얗고 노란 숱을 가득 품어낸다. 그리고 다비식처럼 꽃잎을 떨쳐내며 하얀 겨울을, 평안의 나날을 맞이한다. 다시 찾아온 봄, 세상은 다시 국화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언제나 시련은 되돌아오고, 사계는 또다시 그 이상의 경지를 알려준다.
조계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한 빛과 향을 쉬 지나치기 힘들었다. 조계사는 일주문 입구부터 국화로 넘쳤다. 거대한 고목에는 국화 꽃다지가 만발했고, 어린 동자들은 국화 옷을 입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조계사는 도시 속 고찰과 현대식 상점들이 어우러져 언제나 특별한 감흥을 전한다. 계절을 따라 몸집이 불어나는 가로수와 울긋불긋 화장하는 화단도 정겹고,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벤치와 사진을 찍는 다양한 사람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오랜 세월을 버텨온 건축물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향취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빌딩 숲의 삭막함을 한 방에 날린다.
조계사 앞마당에 들어서면 곱디고운 국화 화단 천지다. 사람이 다니는 길 말고는 모두 국화다. 보리수나무, 코끼리, 연등 모양의 국화 조형물과 세월의 깊이를 아로새긴 단청, 청정한 세월을 버텨온 탱화들은 한 폭의 한국화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비단처럼 부드러운 바람은 코끝을 간질이고, 가을 햇볕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하늘 또한 더없이 맑아 도시의 때까지 쭉쭉 벗겨낸다. 인파 속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국화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젖어보니 하루의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사라진다. 저절로 빙긋이 미소를 머금는다.
조계사에는 소문이 났는지 제법 사람들이 많다. 대웅전 앞에는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는 신자들도 눈에 띈다. 속세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오늘을 사는 활력을 얻으려는 불자들이다. 그 마음에서 신념과 절도, 이웃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그 얼굴이 어찌나 아름답고 편안하게 보이는지 가슴 안의 응어리까지 모두 풀어지게 한다.
조계사 뒤편에도 국화꽃이 뿌려져 있다. 각양각색의 국화들이 여러 형태로 연출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월의 흐름을 벗하며 오랜 시간 계속돼 온 국화의 향연을 보면 ‘정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성스럽게 가꾼 국화, 그리고 이곳을 찾은 불자들의 마음 또한 정성이다. 수능 시험을 앞둬서인지, 학부모들의 간절함에도 정성이 묻어난다. 모든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은 그만큼의 결과를 얻게 한다. 비록 그것이 아니더라도 더욱 가깝게 성취하도록 돕는다. 삶은 정성이 우러나야 한다. 그 옆으로 삼삼오오 모여 국화빵을 먹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매실차, 대추차를 파는 찻집에는 화사한 웃음꽃이 피었다.
조계사는 1910년 한용운 등이 주축이 돼 세운 ‘각황사’가 1938년 중수를 거쳐 ‘태고사’로 불리었다. 이후 1954년 일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불교정화운동을 통해 현재의 이름을 가졌다.
조계사의 국화는 조약돌처럼 섬세한 촉감과 거센 들판의 깔깔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날카로운 예지로 삶의 여로를 다듬어 가는 모습이랄까. 정말로 아름답다. 남들이 국화를 좋다고 해서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서면 조계사를 물들인 국화와 함께 수척한 가을 틈을 환하게 밝히며 사는 사람들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또 내리쬐는 햇볕과 휘몰아치는 장마, 거친 태풍을 이겨낸 국화의 자태는 지독한 성찰을 부른다.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마음속에서 ‘나도 중년이 되면 국화처럼 아름답게 물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국화는 끝없는 상념을 부른다. 불꽃같은 갈망을 잠재우고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씻어주며 지친 삶을 위로한다. 그것은 아마도 국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인 것 같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특히 자비와 해탈이라는 불교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어 더욱 그런 것 같다.
매년 가을이 되면 전국에는 국화축제로 들썩인다. 전남 함평 ‘대한민국 국향대전’, 경남 창원 ‘가고파 국화축제’, 전북 익산 ‘천만 송이 국화축제’ 등이다. 먼 곳까지 갈 수 없는 서울 시민들에게는 조계사 국화축제가 그만이다.
남들은 계절에 한 발 앞서 만끽하고자 벌써 해외 스키장으로 눈을 돌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주위에 눈을 돌려보면 생각은 금방 달라진다. 조급하게 앞만 보고, 즐거움에만 취해 사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시원하고 달디 단 국화의 향에 혼탁한 가슴이 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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