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여름, 가을 전성기를 구가한 뒤 성찰의 시간을 보내면서 정결하게 소생할 봄을 기다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를 구한 선지자라도 어찌 부끄러운 적이 없었겠나. 고난과 고행의 겨울처럼 혹독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기에 새로운 날도 개척할 수 있었다.
입춘을 지나 우수에 이르면 따뜻한 봄기운이 살랑거리며 얼어붙은 계곡물이 민낯을 드러낸다. 수척한 마음을 녹이듯 포근하게 봄이 다가온다. 하지만 요 며칠 추위가 다시 찾아와 심중을 할퀸다. 아직 봄은 멀었나 보다. 그러나 마음속에 들어앉은 봄기운을 물리치긴 힘들다.
몸을 움직이자. 선한 마음대로 살기 어려운 세상, 마음이 지척이면 천 리도 지척이다. 마음을 다스리고 명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홀로 걷는 자적이 필요하다. 산마루 넘어가는 흰 구름, 따사로운 태양을 쫓아 마음을 움직이자. 좁거나 굴곡진 산길을 걸으며 마지막 반성의 시간을 자연에 맡겨보자.
곧 있으면 지리산에는 설산과 산수유가 공존한다. 붉고 노란 꽃과 연둣빛 신록이 산등성이를 따라 번지며 흥타령을 벌이지만 산간지대는 아직도 한겨울이다. 지리산에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평범한 풍광일 게다. 하지만 봄을 맞는 지리산은 도시인에게 숭엄한 자태 그대로다.
홀가분한 마음에, 덩치 큰 지리산 종주는 너무도 부담스럽다.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드높아 보일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지리산과의 동화는 꼭 본 줄기를 타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지척에 지리산 둘레길이 있다. 둘레길은 본줄기에서 떨어져 있지만 산은 산이고, 험한 두멧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 3개도와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5개 시군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아우른다. 길이는 장장 274km에 이르며,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한다. 자연, 역사, 문화, 마을 등을 두루 탐방할 수 있겠다.
지리산 둘레길은 총 21개 구간이며, 중복구간을 포함하면 22개다. 둘레길 코스는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금계-동강, 동강-수철, 수철-성심원, 어천-운리, 운리-덕산, 덕산-위태, 위태-하동호, 하동호-삼화실, 삼화실-대축, 하동읍-서당, 대축-원부춘, 원부춘-가탄, 가탄-송정, 목아재-당재, 송정-오미, 오미-난동, 오미-방광, 방광-산동, 산동-주천이다.
지리산 둘레길 중 1코스 주천-운봉, 2코스 운봉-인월, 3코스 인월-금계를 추천한다. 1년 정도 계획을 잡고 지리산 둘레길의 모든 코스를 둘러봐도 좋을 듯싶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주천-운봉
주천면-내송마을-솔정지-구룡치-회덕마을-노치마을-던삭저수지-질미재-가장마을-서어나무숲-행정마을-옛 양묘장-운봉읍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운봉고원의 들과 6개 산촌마을, 제방을 걷는 길.
아직은 바람이 차다. 찬바람이 산사와 골짜기를 따라 평지로 쏟아진다. 초봄을 알리기 위해 각색하는 온갖 피조물들을 움츠리게 만든다. 서너 시간 햇볕이 내리쬐면 한기는 조금 물러날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자연은 마치 업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육체를 씻기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이 의식이 끝나고 나면 자연은 생명과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현실을 정화하고 달래주는 건 역시 자연의 숨결뿐인가. 그럼 인간은?
지리산 둘레길 1코스는 지리산 둘레길 공영주차장에서 시작된다. 멀리 운봉고원을 바라보며, 소박하고 단아한 시골 풍경을 지나면 지리산 둘레길로 접어든다. 곧 있으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자연의 경이를 보여줄 것이다. 이미 아주 작은 새싹들이, 홀로 견뎌내고 여럿이 어울리며 자연의 장대함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무척 낯익은 풍경이다. 고향을 찾아온 사람의 마음처럼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내송마을 개미정지에 도착했다. 얼마 걷지 않았지만 이른 산행이 피곤을 부른다. 이곳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자연과 노닥거린다. 참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다. 먼 훗날 시끄럽게 흔들리며 살다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이 풍경은 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변함없는 이해와 사랑으로 받아 주리라. 연민의 폭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 것 같다. 사람이 아닌 그 어떤 생명에라도.
‘솔정지’와 ‘구룡치’를 잇는 길은 폭이 넉넉하고, 고르다. 나이 든 노인도 쉽게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경사도 완만하다. 여느 산길과 다르지 않게 평이한 길이지만, 그런 연유로 갖가지 사유를 부른다. 특별한 것이 꼭 아름다울 순 없다. 잘난 사람만 멋진 것도 아니다. 언제부턴가 모든 사물의 본질을 생각해보는 취미가 생겼다. 일종의 유희다. 그런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소나무가 용처럼 몸을 휘감으며 자란 ‘용소나무’와 소망을 비는 돌담길 ‘사무락다무락’이 펼쳐진다. 고요한 마음으로 숲길을 걸으며 여유를 느끼기에 최고의 코스다. 최고라고 하면 대단한 찬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이 천국도, 지옥도 될 수 있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하다. 모든 사물에는 저마다 매력이 있다. 산사의 풀 한 포기, 계곡의 돌멩이 하나에도 모두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내재돼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가 피난해 살던 것이 시초가 된 회덕마을에는 샛집이 있다. 옛날 선조들은 보통 짚을 이용해 지붕을 만들었지만 이곳엔 억새로 지붕을 만들었다. 주위가 온통 임야인 까닭이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소박한 마음으로 살았을 조상들의 모습이 발견된다. 회덕마을 샛집은 민속자료로 등록돼 있다.
쭉 걷다보면 노치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 위쪽에 있는 고랭지로, 뒤에는 덕음산, 앞에는 고리봉과 만복대가 있다. 비가 내려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된다. 계속해서 만나는 곳은 덕산저수지다. 이곳부터는 주천면이 아니라 운봉읍이다. 주민들은 20년 전까지 남원 5일장을 가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덕산저수지를 지나가면 행정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 담벼락에는 예쁜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은 6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서식하는 숲이 유명하다. 이 숲은 조림된 지 180년이 넘었다.
서어나무숲을 지나 운봉읍내로 들어가면 지리산 둘레길 1코스가 끝난다. 1코스를 걸으면서 소탈하고 평화로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특별할 것은 없지만 수더분하고 안정된 느낌. 꼭 어울릴 것에만 어울리고, 가져야 할 것만 가진 무구의 미학이 숨 쉰다.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인월
운봉읍-서림공원-북천마을-신기마을-비전마을-군화동-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마을-인월면 (9.4km / 4시간 소요).
바래봉, 고리봉을 연결하는 지리산 서북 능선과 고남산, 수정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을 보면서 걷는 길.
지리산 둘레길 2코스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즐기면서 걷는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물론 2코스는 1코스 종착지인 운봉읍내에서 시작한다.
2코스는 호사스럽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탄성을 부른다. 인간과 자연이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하지만 한 없이 놀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꼭 하나씩은 알려준다. 쾌락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적들을 보면 한때 융성했던 그 시대의 역사가 보인다. 하지만 방심하거나 나태하면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롭고 무상한 것이 되고 만다.
운봉읍내를 지나 조금만 가면 서림공원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느티나무와 밤나무 등으로 우거졌었지만 폭풍과 병해로 모두 고사해 현재는 서어나무 5주, 느티나무 40주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서림정, 석장승, 충혼탑이 있다.
운봉읍내에서 1km 정도 걸으면 북천마을이 나오고, 길은 신기마을, 비전마을, 전촌마을, 비전마을로 이어진다. 북천마을은 북쪽 냇가에 소나무가 우거졌다고 해서 벽송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돌로 만든 장승2개를 지나 한참을 걸으면 신기마을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때 터를 잡은 인동장씨가 세운 마을로,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라는 뜻인 ‘새터’라고도 불린다.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를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비전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이 황산대첩비 앞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황산대첩비는 이성계의 왜구토벌 승전비다. 왜구가 지리산 방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삼도통사로 있던 이성계가 이들을 토벌했다.
계속해서 이곳이 국악의 본 고장이요, 성지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된 ‘국악의 성지’가 나온다. 이곳은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될 만큼 예로부터 국악의 산실이었다. 아울러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넓디넓은 마당에 서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여러 가지 추억과 그리움이 떠오른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정겨워 보이고, 탁주 한 잔도 생각난다. 아무래도 음악이라는 매개 때문이겠다.
군인들이 지은 화수마을 ‘군화동’을 지면 넓게 펼쳐진 옥계저수지가 나온다. 그리고 2코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흥부골 자연휴양림’이 나타난다. 이곳은 잣나무 군락으로 경관이 뛰어나고, 삼림욕으로 유명하다. 휴양림에는 덕두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돼 있으며,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다. 둘레길을 걷다 여유가 있으면 이곳에서 여로를 잠시 풀어도 좋겠다.
흥부골 자연휴양림은 국악의 성지와 비슷한 감흥에 젖게 한다. 깊은 골짜기에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이 따뜻한 기운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세월이 아무리 급하게 재촉해도 산을 찾는 마음은 비우고 또 비우게 만드는 비약이다. 산에 오면 세속의 허망한 경계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고, 늘 변함없는 여유와 고요함을 선사한다.
월평마을을 지나면 지리산길 안내센터가 나온다. 이것으로 2코스는 끝난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금계
인월면-중군마을-수성대-배너미재-장항마을-장항교-산신암 삼거리-등구재-창원마을-금계마을 (19km / 8시간 소요).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면서 6개 산촌마을과 논밭을 걷는 길.
지리산 둘레길 3코스는 중군마을을 지나 ‘황매암’이 서막을 연다. 황매암은 노란 매화가 인근이 많이 피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일장스님이 2004년에 창건했으며, 시원한 약수가 일품이다.
황매암을 지나면 과거 전란 때 외성을 수비했다고 붙여진 ‘수성대’가 있다. 그리고 수성대에서 산길을 오르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 ‘배너미재’다. 이곳을 지나면 길은 장항마을, 매동마을, 중황마을, 상황마을, 창원마을, 금계마을로 이어진다.
이 길은 평범한 시골길, 오솔길이다. 좀 특이한 곳이 있다면 상황마을에서 창원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인 ‘등구재’다. 등구재는 거북 등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등구재는 창원마을 사람들이 인월까지 장을 보거나, 혼례를 치르기 위해 넘던 재라고 한다.
봄을 맞이하는 지리산은 가슴속에 찡한 감동을 선사한다. 내리쬐는 햇볕과 거친 태풍, 휘몰아치는 장마와 사나운 눈보라를 이겨낸 의연한 자태는 우리 가슴속에 곪은 응어리를 치유하는 손길 같다. 혹독한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면 봄의 지리산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 때문에 호흡이 느긋해지고 웃음부터 나게 된다.
평소 많이 걷지 않은 도시인들은 하루 종일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허벅지까지 뻐근할 것이다. 그럴 때는 구수한 파전과 쫀득한 도토리묵에 탁주 한 잔 하면 몸이 이완돼 피로가 잘 풀린다.
참고로 지리산둘레길 중 밤재-주천 코스는 지리산 둘레길의 도착지점이자 1코스 출발지점인 주천으로 가는 길이다. 코스는 밤재-앞밤재-벼락박골-부덩데미-꼭두마리재-절터-정문등-안용궁-농암정-새뜸-원터거리(둘레길 주차장)-주천면으로 이어지며, 거리는 7.05km, 시간은 3시간 30분 소요된다. 이곳은 경사가 완만하고 코스가 짧아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례에서 밤재를 넘어가면 남원이 나온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자연의 순수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밤재를 지나 ‘꼭두마리재’를 넘어가면 예부터 고승이나 선사들이 자주 들려 휴양했다던 ‘부흥사’가 나타난다. 부흥사는 바닷속 용궁 같아 땅 위의 용궁이라고 불렸으며, 요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바위 위에 정자를 지어놓은 ‘농암정’을 지나면 ‘원터거리’가 나온다. 조선시대 원님이 말을 매고 쉬어가는 장소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터거리를 지나면 지리산 둘레길 1코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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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여행 시 꼭 알아둬야 할 사항
쓰레기를 버리지 않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후손에 물려주기 위해 공중도덕을 잘 지켜주세요. 특히 쓰레기는 꼭 되가져갑시다.
사진을 함부로 찍지 않습니다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때는 허락을 받고 찍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몰래 사진을 찍히는 일은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입니다.
미리 계획을 세웁시다
지리산 둘레길은 관광지가 아닙니다. 미리 구간과 숙소를 계획해야 합니다. 식당이나 편의시설도 드뭅니다. 도시락과 간식, 물 등은 꼭 준비해야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합니다. 대중교통도 도보여행의 일부입니다. 자유롭게 걷고, 탁주도 한 잔 하려면 대중교통이 좋겠죠.
삼삼오오 모여서 오세요
10명 이하의 작은 모둠 여행이 좋습니다. 가을 산행에서 사람들에게 치인 기억이 한두 번씩은 있을 겁니다. 걷기에는 호젓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농작물과 열매는 손대지 마세요
옛날에야 서리가 문화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농작물과 열매는 지역 주민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키우는 소중한 재산이거든요.
화장실이 없습니다
지리산둘레길에는 공중화장실이 거의 없습니다. 급하면 어쩔 수 없이 바지를 내려야겠지만 터미널, 숙소, 개방화장실을 이용하세요. 인근에 마을이 있으면 사정을 허락받고 이용하시고요.
지리산 둘레길 이야기꾼을 소개해 드립니다
지리산 둘레길에는 이야기꾼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신청하시면 무료로 안내합니다. 남원시 문화관광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단 3명 이상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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