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여행과 사색

지리산 화개재 - 메마른 감성 일깨우는 트래킹

이동권 2022. 10. 10. 20:56

지리산국립공원 ⓒ국립공원공단


소슬바람이 땅에 닿는 소리를 듣는다. 하얀 눈을 재촉하는 샛노란 목엽의 소멸을 본다. 붉은 열매 뚝뚝 떨어지는 산매자나무 아래에서 생의 열정을 마시고, 저녁이면 부엉이 울었을 준봉에 서서 속세의 소음과 먼지로부터 격리된 미지의 평온을 감지한다. 산과 만나는 기쁨은 멀리 있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알록달록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을 때, 바위 모서리에 부딪쳐 울어대는 물소리를 들을 때,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는 순간을 목격할 때, 그 자체가 쏠쏠한 기쁨이다.  

흐르는 물소리 벗 삼아 좁지만 탁 트인 산길을 걷는다. 아름드리나무가 두 팔을 벌려 기꺼이 환영한다. 언제나 그렇듯 나무는 아름답다. 나무는 서로 의지하고 부대끼면서 스스로 산이 된다. ‘함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몸소 실천한다. 나무는 사나운 비바람에 끔찍하게 꺾이고 베어져도 가을이 되면 꿋꿋하게 만색을 연출하면서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달랜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무궁한 뿌리로부터 자신을 잃지 않는다. 나무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가는 위대한 예술가나 철학가를 닮았다. 

나무와 다르게 인간은 서로 마음을 열고 나란히 서 있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운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완성하는 모습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 일신의 평안과 물질적 욕망을 극복하는 과제,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숙명을 깊이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도 거기에 있다.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 소멸을 감내하는 나무를 생각하면서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한 혹독한 성찰에 빠진다. 

단풍과 낙엽, 산바람 뒤섞인 지리산 뱀사골
고독과 절기 넘치는 지리산

지리산에는 매년 ‘뱀사골단풍제’가 열린다. 경치가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듯 뱀사골도 예외일 수 없다. 뱀사골 단풍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 중 하나다. 10월 중순이 되면 뱀사골 옛 탐방 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완만하다. 운신할 기운만 있다면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사치할 수 있다. 이곳을 인체와 비교한다면 지리산의 얼굴이라 할 만하다. 천혜의 비경과 단풍의 빛깔이 버무려진 모양새가 제법이다. 추색에 취해 저절로 술기운이 오른다고나 할까. 

지리산 단풍구경의 절정은 뱀사골단풍제가 끝난 이후다. 산은 단풍이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쓸쓸한 풍광을 연출한다. 하얀 눈이 내리지 않으면 고독한 방랑자의 그림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시기만큼 커다란 사색을 불러오는 때도 없다. 낙엽과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진 11월의 산이야말로 고독과 절기가 넘치는 산사람의 모습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이 계절에 뱀사골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화개재트래킹’을 즐긴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찬연한 산색에 빠질 수 있는 코스다. 하지만 좀 더 산행에 무게를 두는 사람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뤄지는 능선으로 움직인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이나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아니면 1박 2일로 백무동, 천왕봉 능선을 타거나 바래봉, 장터목, 삼정산 코스를 즐긴다. 

지리산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남에서 북, 혹은 북에서 남을 가로지른다. 인적이 드문 등산로를 거닐며 지리산의 참맛을 즐기려고 한다. 남북 종주 등산로는 산세가 험하고, 길이 끊어진 곳이 많다. 걷다 보면 절벽이 나오고, 땅벌을 밟아 줄행랑치는 경험도 하게 된다. 산을 많이 다녀본 사람도 주의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 이곳은 자연과 동화되기에 최적의 장소다. 가는 곳마다 천연의 동식물이 어우러져 입이 떡 벌어진다. 뱀은 물론 고슴도치, 담비, 삵, 딱따구리 등 야생 동물과 천연기념물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등산로에는 지리산 빨치산 격전지도 많다. 

가장 유명한 곳은 교과서에도 실린 ‘이현상 최후 격전지’다.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벽소령 너머로 닦았던 작전 도로를 걷다보면 빗점골 들머리가 나온다. 이 둘레는 천혜의 자연 요새처럼 운둔하기 좋은 곳이 많다. 큼직한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들도 있고, 시원한 계곡물이 넘쳐 식수 걱정 또한 없다. 이곳에는 국군 수색대와 결전을 벌이다 죽은 이현상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주말이 되면 이곳에는 어른들과 학생들이 견학을 온다. 인솔자들은 무심코 ‘빨갱이’ 운운하며 반공교육을 한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렇지 않으리라 믿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사람에게 누가 욕을 할 수 있는가. 비록 서로 삼팔선을 두고 총을 겨누고 있지만, 그 애국과 충정만은 다른 각도로 보고 설명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리산 북부 관리 사무소에서 요룡대 - 탁용대까지
자연과의 깊은 유대감에 전율

뱀사골 계곡을 둘러보면서 완만한 등산로를 올라가면 안내판이 나타난다. 화개재까지 왕복 17.8킬로미터. 날씨가 화창한 데다 시선을 어디에 두던지 고매한 단풍이 사진 찍히듯 눈에 들어와 기분이 마냥 좋다. 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청량감은 밤마다 낯익게 찾아오는 불면의 고통까지 없앤다. 긴 산행의 예감이 나쁘지 않다.  

이곳 안내판에 따르면 지리산 화개재 등산 코스는 지리산 북부 관리 사무소 - 요룡대 - 탁용소 - 뱀소 - 병소 - 병풍소 - 제승대 - 간장소 - 막차 - 화개재로 이어지며, 등산 시 5시간 하산 시 4시간 걸린다. 그런데 삼사십 대 건강한 사람이라면 올라갈 때 4시간, 내려갈 때 3시간이면 가능하다. 무리한 산행을 원치 않으면 간장소까지만 다녀와도 좋다. 뱀사골에서 간장소까지는 원만한 편이지만 간장소부터 화개재까지는 좀 힘들다. 

뱀사골 표지판을 뒤로하고 좀 걷다보면 ‘요룡대’가 나온다. 요룡대는 지리산의 흔들바위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는 와운골과 뱀사골 원류가 만나며, 높이 30미터가 넘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모습은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 요룡대라고 불린다. 

이곳의 첫 느낌은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바위의 떨림이 상상되면서 오묘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요령대에서는 타인과 비슷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 예술에 생을 바친 위대한 예술가의 고독과 열정이 느껴진다. 순수하고 경건한 성품을 지녔거나 자신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면 외로움도 따라오게 마련이다. 이곳에도 검은 이끼들이 표면에 번지고, 작은 나무와 풀들이 바위틈마다 제자리를 잡았다. 

요령대를 지나는 계곡마다 나뭇가지들이 늘어져 춤을 춘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소는 짙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감푸르고, 가을의 햇볕이 내려앉은 계곡 곳곳에는 생을 다한 낙엽들이 땅속에 몸을 감추며 흙내를 더한다. 이곳을 걸으면 맑고 그윽한 눈매를 가진 산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열리고, 사랑이 싹튼다. 이 순간 돈과 명예가, 욕망과 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자연과의 깊은 유대감에 전율하고, 마음속에서 사려져 간 사람들을 추억하면서 회한에 젖을 따름이다. 

곧이어 물줄기가 쏟아지고 묻히는 깊은 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큰 뱀이 목욕을 한 뒤 허물을 벗고 용이 됐다는 전설 때문에 ‘탁용소’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이곳에는 뱀소, 병소, 병풍소에서 흘러온 물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인다. 

탁용소는 갖가지 고통과 번뇌를 이겨내고 완숙에 이른 성인을 연상시킨다. 이곳을 인간에 비유하자면 열화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 또렷한 몸가짐으로 기품이 깃든 사람, 거대한 정신의 완성을 이뤘지만 겸손의 미덕을 잃지 않는 사람,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 탁용소를 그렇게 가슴에 담는다. 

세상에 남겨두고 갈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살아 있을 동안 마음을 보여주고 표현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걱정한다면 얘기하고 행동하면서 마음을 나눠야 한다. 그것이 멋있는 삶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의 삶은 건강과 오락, 물질에만 집중돼 있는 것 같다. 세상이 혼란하고 사람들이 힘들어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들이 늘어나도 선뜩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 없다. 

탁용소에서 제승대 - 간장소 - 화개재 지나 서울로
메마른 감성 깨운 화개재 트랙킹

탁용소에서 늘어지게 쉰 뒤 길을 재촉한다. 1,300년 전 송림사 정진스님이 불자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해 제를 올렸던 ‘제승대’를 지나면 검푸른 물색이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간장소’가 나타난다. 이 소는 영호남을 오가던 옛 소금상인들이 화개장터에서 화개재를 넘어오다 이 소에 빠져 간장이 됐다는 이야기, 이 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까지 시원해진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이곳은 원시와 만나는 느낌을 준다. 오랜 시간 물이 내려오는 길이 파이고, 햇빛에 반사된 물과 신비로운 밑바닥이 뒤엉키면서 한 폭의 한국화를 그려낸다. 옛사람들이 타오르는 태양을 등에 짊어지고 걷다 이곳에서 물을 마셨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르렀다. 수많은 청춘이 있었고,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지금이 됐다. 그래서 죽음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생명의 종착지를 앞두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미래의 어느 젊은이가 이름조차 없이 사라질 우리를 기억해내며 웃으면 그만. 또 무엇을 바라겠나. 

현세의 모든 일은 불행하게도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다고 삶을 자신과 생존을 위해서만 산다는 건 매우 불쌍한 일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스스로 그런 마음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한없이 성숙하고 사랑하며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똑같은 것을 봐도,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간장소를 지나 한참을 걸으면 가파른 계단이 나타난다. 이곳을 올라가야 화개재에 갈 수 있다. 봉우리에 오르는 기분이 그렇듯, 단풍이 양옆으로 어우러진 계단을 따라 하늘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기분은 신선놀음이다. 속세의 타락과 소멸을 순수와 재생으로 이끌고, 시간의 긴장감도 없애며, 자신의 가장 꾸밈없는 모습과 만나게 한다. 또 운명의 끝과 닿을 때 인간이 가장 순수하게 되는 것처럼 이곳은 모든 잡생각을 지워버린다. 

‘화개재’의 해발은 1,316미터다. 이곳은 노고단과 연하천 대피소, 반선의 갈림길이자 영호남을 이어주는 고개다. 앞마당이 무척 넓고 나무가 없는 민둥 고개로, 이곳에는 돗자리를 깔고 식사를 하거나 쉬어가는 사람이 많다. 아침 8시에 뱀사골 입구에서 출발하면 12시 정도에 이곳에 도착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단풍의 향연, 화개재 트랙킹은 내면에 머무르고 있는 메마른 감성을 일깨운다. 생명이 지녀야 할 가치, 우리가 살면서 짊어져야 할 몫을 읽어내도록 돕는다. 이 아름다운 강산을 지키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방법은 무엇일까. 역시 함께 손을 잡고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 삶에서 사랑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형세는 계속해서 달라지고 인간의 삶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인류 모두에 관통하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지키며, 영혼이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행을 마치고 고속도로를 씽씽 달려 서울에 돌아오니 가로등이 줄줄이 켜 있다. 평소 같았으면 피로와 무기력에 빠져 술이 필요한 시간.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쓸데없는 공상도, 불면의 고통도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 미세한 장막이 펼쳐지면서 정신이 더욱 오롯해졌다. 자주는 못 가더라도 산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다 싶다. 고백하지만 술이 당기지 않았던 이유는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많이 마신 탓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