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봉원사. 경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매미소리와 한여름의 열기를 소리 없이 받아낸다. 부처의 온화한 미소처럼 대자대비의 향을 살라 탐욕과 욕망을 다스리고, 순백의 자아를 투영시킨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생각이 들어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렇다고 머리를 깎고 사문(불문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사람)이 될 수도 없는 노릇. 세상에서 좋은 일을 닦고 부지런히 살면 조금은 위로가 될 것이다.
활짝 핀 연꽃이 청정한 빛을 뿜어낸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깨끗한 화색(花色)에 마음이 매료된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부정적인 카르마(업보)가 정화되는 기분이다. 돌로 만들어진 연꽃 모양의 물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약수를 한 식기 마시니 술과 고기, 온갖 인스턴트 음식으로 망가진 소화기관이 좋아 죽는다. 수양도 할 겸 봉원사에 얼마 동안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약수가 떨어지는 아래 물받이를 더듬더듬 보니 동전이 한가득이다. 수많은 번뇌에 애를 태우는 사람들이 느껴진다. 부처의 자비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깨달음을 선사했다. 연등의 환한 불빛이 세상에 스며드는 것처럼 얻음과 잃음,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지혜로 미혹을 소멸하도록 도왔다. 봉원사는 1952년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되는 등 수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심연과 같은 고요 속에서 ‘육바라밀’을 떠올린다.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 자비와 불심의 수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생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가야 할 때가 생기는 것 같다. 그때를 잘 알면 인간은 언제나 평온해진다. 물론 삶 또한 물질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찌우는 일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봉원사 경내에 들어서면 총천연색 연꽃들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연꽃 향 가득 실은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오롯이 서 있는 꽃대는 지난한 세월의 앙금이나 티끌을 씻어내려는 듯 알 수 없는 평정심을 심어주고, 물 위에 둥둥 떠서 사는 부평초는 일상에 옥죈 마음을 이완시킨다. 또 벌과 나비, 잠자리는 가벼운 바람에 잘랑하며 운치를 더하고, 갖은 시름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을 곁으로 부른다. 자신을 내어주는 연꽃이기에 가능하다.
봉원사의 연꽃은 모두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에 심어져 있다.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자연에 내맡긴 것처럼 길러진 탓이다. 봉원사에는 이 플라스틱 용기가 매우 많고, 이 용기마다 연꽃이 가득하다. 아직까지 도심에서 이렇게 많은 연꽃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전남 무안에서 본 연꽃단지의 거대함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섬섬옥수처럼 자란 이곳 연꽃은 도시인들의 긴장을 녹여주기에 충분하다.
연꽃의 달콤하고 강렬한 색채는 언제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로 옆에 부처의 손길이 있는 것처럼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준다. 그야말로 정열적이다. 미완의 젊음이 풍기는 정열과 다른 성질의 것이다. 삶의 덧없음을 모르는 정열은 욕망일 뿐. 성숙과 관조, 자비와 성찰이 가득한 정열이야말로 청정하고 고고하다. 세상을 관망하고, 불의에 맞서고, 아픔을 껴안고, 힘겨움을 웃음으로 변용할 수 있어야 진정 아름답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주위를 깎아 내린다. 칭찬하고 긍정하기보다는 시기하고, 심술부리며, 헐뜯는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결점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을 평가해버린다. 모순이다. 보통 평가할 때는 자신의 세계관과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된다.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 평가 또한 자연스럽게 형평성을 잃는다.
중요한 것은 관용이다. 너그러움이고 사랑이며 칭찬이 필요하다. 이것이 덕이고 상생이지 미움과 이욕, 폄사는 악이다. 어떤 삶을 살아가든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며, 타인의 노력을 인정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을 연꽃은 소리 없이 얘기한다.
혼란한 세상사에도 흔들림 없이 피어난 연꽃을 보니 혼잡한 마음이 금방 진정되는 것 같다.
봉원사는 도심에서 즐기는 산책코스로도 그만이다. 봉원사 주위를 돌다 보면 왜 이런 곳을 아직까지 몰랐냐 싶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대웅전 본존불상과 탱화는 구김 없는 미소로 반긴다. 원래 봉원사에 있던 탱화는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 탱화는 이만봉 인간문화재의 작품이라고 한다. 또 법당 안에는 범종이 있다. 이 범종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을 수행하던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고, 그때 타지 않았던 종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호젓한 사색을 선사하는 16나한상을 지나 칠성각, 미륵전, 만월전, 극락전, 명부전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은 도시의 바쁨을 느림으로 바꿔준다. 또 군데군데 이끼 낀 돌담, 한 많은 역사를 간직한 축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며 뎅뎅거리는 풍경, 간절히 손을 모으고 절을 올리는 불자들은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감복을 전해준다.
봉원사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관음바위’다. 이 바위는 봉원사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늠름하다. 진리를 등불 삼아 의지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자혜롭게 느껴진다. 봉원사에서 관음바위를 바라보면 막혀 있던 속이 ‘펑’ 뚫리는 것처럼 가슴이 시원해진다. 관음바위는 바위가 마치 관세음보살이 누워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봉원사는 견고하고 섬세한 외관, 유려한 역사를 간직한 기품, 깊게 스민 한여름의 색감, 웃음 가득한 스님과 불자 등 모든 것들이 깊은 불심과 정교한 장인 정신으로 어울려 조화한다. 그렇다고 쫄 필요는 없다. 교회에 다닌다고 불편해할 필요도 없다. 봉원사는 절이지만 몸가짐에 크게 신경 쓰거나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둘러보면서 일상의 위로를 얻길 바란다. 단 사찰인 만큼 최소한의 예절은 지키는 것이 좋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금물이다.
이곳을 볼거리라고만 생각하면 감흥은 크지 않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진솔하게 자신의 삶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연꽃과 함께 부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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