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준영 교수 - 거리의 인문학자

이동권 2022. 10. 9. 21:43

최준영 교수


최준영 교수는 아주 특별한 대중 강사다. 학식이 높아서도, 강사료가 비싸서도, 대단한 것을 가르쳐서도 아니다. 강의를 듣는 청중 대부분이 모질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강의를 펼쳐왔으며, 최근에는 힘겨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그의 경험을 듣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그를 초청강사 1순위로 꼽고 있다. 

최 교수는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교수, 페이스북 논객으로 불린다. 그에 대한 수식어는 그 자체로 그를 대변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노숙인과 교도소 수형인, 그리고 여성 가장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는 강의할 때 상대방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감추고 싶은 과오든, 용서를 빌 일이든 개의치 않고 자신부터 내보인다. 때론 그것이 먹히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는 진심은 통한다고 믿고 열의를 쏟는다. 자신 또한 어렵고 힘든 삶을 겪었고, 극복해왔기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교수와 제자의 관계였지만 스스럼없이 형님 동생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가슴 아픈 과거사도 얘기하며 울고 웃게 했다. 그런 소통과 열정은 어느새 그를 작가로, 교수로,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우산을 씌워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는 맞는 것, 노숙인 강의를 할 때마다 이 말을 가슴에 아로새겼다.”면서 “‘함께 비를 맞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최준영 교수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했다. 사람들은 노숙인을 두고 냄새나고 더럽다며 시선을 피하고, 삶의 의지가 없는 룸펜이라고 폄훼하기 바빴지만 그는 거기, 그곳에서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 바탕에는 그의 영혼에 깃든 연민과 사랑이 있었지만 그 뿌리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것은 인문학이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인문학을 원천으로 용기와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누는 것보다 생각을 바꾸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인문학을 가르쳐왔다. 

최준영 작가가 태어난 곳은 상계동 산동네 무허가촌이다. 도깨비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일 매일 무허가 건물이 세워지고 철거되기가 반복되는 곳,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는 묵언의 허가를 받아 세대가 늘어나는 산동네였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그의 어머니가 시장 어전에서 버린 생선 머리를 가져와 국을 끓을 정도로 끼니를 연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돈을 벌면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야학에 다니면서 대학에 들어갔다. 야학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야학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이야 주 5일 근무가 보통이지만 1980년대만 해도 한 달에 두 번 쉬는 것도 힘들었다. 또 하루하루 먹고사는 고민이 많은 데다 모아 놓은 돈도 없어 대학 진학은 다른 나라의 얘기와 같았다. 

“야학에서 고등부에 다니던 미연이 누나가 있었다. 경력이 10년도 넘는 베테랑 미싱사였다. 그런 누나가 겨울에 외투 하나로 버텼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단돈 몇 천 원도 못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야학에는 수두룩했다. 야학 학생들 뒤에는 부양가족이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수원 28세 여성 살인 사건이 있었다. 이 여성의 삶은 야학에 다닐 때 만났던 친구들과 누나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하고 받는 돈은 170만 원 정도 됐다. 그중 150만 원 정도를 아버지 카드빚으로 냈고, 나머지 돈으로 동생 용돈을 줬다. 근데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CCTV를 보니 그녀는 한 달여 동안 같은 옷을 입고 그 길을 지나가더라. 스물여덟.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라는데 30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언론은 의도적으로 그 여성과 관련된 기사 쓰기를 주저했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신 범인의 극악무도한 범행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대의 소용돌이 휘말려 팔뚝질을 하다 보니 경찰서에도 끌려가고, 연거푸 제적도 세 번이나 당했다. 그러나 그는 졸업장에 연연하지 않고 대학 생활을 끝냈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야학에 투신했다. 하지만 야학이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됐고, 야학 동문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고아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모임을 이어나갔다. 

최준영 교수는 서른이 되기 전 극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사무실을 내고 투자를 받기 위해 시나리오 하나 들고 창투사, 대기업, 영화인들을 만났다. 이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화계 사람들도 알게 되고, 영화 제작의 흐름을 배웠기 때문이란다. 

“지금 생각해보면 금방이라도 얼굴 발그레해질 무모한 일이었다.” 

영화 제작 못지않게 무모한(?)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입시학원을 차렸다. 그는 건물주를 만나 임대 보증금을 분할로 내겠다고 담판했다. 기가 막힌 건물주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의 용기와 기백을 믿고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처음 학원을 운영할 때는 가장 많은 신입생을 모집했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광고문구로 사용해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로 수강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고 버텼지만 남은 건 빚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빚더미에 오른 뒤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낄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밤을 새워 가며 시나리오를 써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최준영 교수는 40대에 들어서서 돈 버는 일을 그만 두고 노숙인 인문학에 투신했다. 그는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을 시작으로 관학인문대학, 경희대실천인문학센터 등에서 노숙인, 여성가장, 교도소 수형인들에게 인문학과 글쓰기 등을 가르쳤다. 그는 강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의를 다해 가르치면서 거지교수,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 일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더 쓰는 일이었다. 

2008년에는 사양산업이었던 잡지 사업을 구상하고 영국으로 날아갔다. 어떻게 하면 노숙인의 자립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노숙인 잡지 ‘빅이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2년여 동안 빅이슈 창간 준비해 매달리면서 감당하기 힘든 빚을 져야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 끝에 빅이슈는 창간될 수 있었다. 

요즘도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한다. 돈 벌러 다니는 일이 아니니 수입은 형편없다. 경비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불러주는 것이 고마워 강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준영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강의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다. 경력이 또 다른 경력을 낳고 실력과 노하우, 진정성을 인정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다. 그는 노숙인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노숙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됐다. 

“노숙인은 잘 곳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보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특히 해마다 명절이 되면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외로움과 고립감에 시달린다. 그럴 때 이들은 밥보다 술을 더 찾는다. 밥은 최소 몇 천 원이 있어야 먹지만 술은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살 수 있어서다. 또 추운 겨울밤을 견디기엔 술이 더욱 효과적이다. 사회의 편견과 소외, 외로움을 잊는데 술이 최고인 것이다.” 

그가 관학인문대학에서 한부모 가정 엄마들의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왕따 당하는 아들을 구하려고 학교에 갔다가 담임선생님에게 홀대당한 얘기부터 처자식 두고 집 나가 딴살림 차린 남자들 얘기까지 다양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런 와중에 노래방 얘기가 나왔다. 그는 그만 수강생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엄마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정말 신나게 잘도 놀더라.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주는 내가 뭐 그리 좋은지 블루스 추자고 교대로 끌어안더라. 이렇게 잘 노는데 홀몸으로 애들 키우랴, 일하라, 천대받는 것 견디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바쁘다는 핑계로, 나도 어렵다는 이유로 그분들을 만나지 못하는 게 미안하다면서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가 안양교도소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안양교도소 인문학 강의를 들은 수형인 반장이 학기를 마친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의 강의를 ‘저렴한 강의’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얘기가 그동안의 강의 평가 중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가 했지만 인문학 강의가 꼭 비싸고, 고급스럽고, 유려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고, 곧 반장의 말에 다른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편안한 강의였다는 뜻 아니겠나. 부담 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고, 더러는 한두 번 걸러도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안 들으면 후회될 것 같은 강의, 제 저렴한 강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저렴은 공감이기도 하다. 그만큼 수형인들과 친숙한 사이가 돼 있었던 것이다.” 

반장은 출소 후 최준영 교수를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최 교수는 교도소에서 인문학 강의를 한 교수들 중에서 그의 전화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최준영 교수는 인문학강의를 통해 지식 나눔을 넘어 삶의 희망을 만들어 갔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거나 일자리를 찾고, 다른 노숙인의 일을 돕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 책 한 줄 읽지 않던 노숙인들이 책을 옆에 끼고 살게 됐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감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은 그를 최고의 강사, 최고의 집필가로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최준영 교수는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 당선이 계기가 됐다. 이후부터 글을 쓰는 일을 거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도 그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구상하거나 어떤 계획을 가지고 쓰진 않았다. 쓰다 보면 글 솜씨도 나아지고, 꾸준히 글이 모이면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써먹을 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글쓰기와 책읽기다. 삶이 고달플 때, 하던 일이 꼬여서 괴로울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지금은 글을 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지경이 됐다. 글쓰기가 삶의 주된 동력이자 내용이자 형식이 됐다.” 

최 교수에게는 기고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가끔은 돈이 되는 원고요청도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유명한 필자가 된 것은 아니다. 다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대학 후배가 푸념을 털어놓더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곳에 글을 쓸 수 있느냐. 자기 글이 내 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데 왜 자기에게는 원고청탁이 들어오지 않느냐고 했다. 그 후배는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인 데다 글도 잘 쓰니까 억울할만했다. 그래서 내가 조언을 해줬다. 여러 매체에 글을 쓰는 것은 다 사연이 있다. 나름 투자를 해서 그렇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얘기해줬다. 그랬더니 투자란 게 뭐냐고 묻더라.” 

그에게 처음 원고청탁을 부탁한 곳은 수원의 한 공부방이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공부방을 운영하는 성공회 신부가 공부방 소식지에 칼럼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어서 원고료 한 푼 받지 않고 매달 원고를 보냈다. 외려 후원금을 내야 할 형편이어서 한 달에 3만 원씩 돈도 보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원고청탁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콩 반쪽’이라는 매체였다. 이 매체도 원고료는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그는 이 월간지의 편집위원까지 맡게 됐다. 

“원고료 없이 매체에 글을 쓴지 2년 여가 지나니까 대기업 사외보 제작 기획사에서 연락이 오더라. 서평 원고를 써달라고. 별로 유명하지 않은 나를 어떻게 알고 연락했느냐고 물었더니 아름다운재단에서 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다음 해 다른 회사에서 또 다른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원고료가 두둑했다. 그때도 누군가로부터 추천을 받았다고 하더라.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해 많을 때는 한 달에 여덟 개 매체에 글을 보내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최근 최준영 교수는 책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를 써냈다. 이 책은 그가 지난 1년간 페이스북에 쓴 글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에피소드들은 우리의 삶과 일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는 “부족한 책”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이 책은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어려운 이웃과 그의 삶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올릴 땐 매양 잘 썼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다음 날 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거다. 삭제해 버릴 수도 없는 게 이미 ‘좋아요’나 ‘댓글’을 달아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글을 밑으로 내리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게 바로 매일같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된 셈이다.” 

이 책의 전작은 마음을 치유하는 인문학, ‘결핍을 즐겨라’다. 이 책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전파하면서 깨달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밖에도 그가 매일 쓴 420자 칼럼을 골라 엮은 책, ‘유쾌한 420자 인문학’이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