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위안 감독 - 지적 유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볼 영화

이동권 2022. 10. 9. 21:34

최위안 감독


낭만은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 한때 낭만은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획일적이고 제도화된 사회, 가치와 의미보다는 물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 문화에 잠식당한 현대인들에게 낭만은 유쾌한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매개다. 좀 부족하면 어떠한가, 좀 망가지면 어떠한가. 좀 공상하면 어떠한가.

영화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우리가 한때 풍미했을 낭만을 한 부부의 삶으로 끌어들인다. 최위안 감독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당하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손편지를 건네고, 어느 누구도 얘기하지 않은 부부의 내면세계를 밖으로 덩그러니 내놓는다.

“지적인 영화다. 지적 유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정도 볼 만한 영화다. 독립영화, 예술영화라고 하면 애들 영화라고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어른스럽고 완숙미가 있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처절한 권태에 빠진 부부. 대화조차 없다. 그저 한 집에 살고, 호적상 부부인 두 남녀다. 최위안 감독은 이 부부의 평범한 삶에 낭만을 버무린다. 낭만은 신비롭다. 개인의 열정과 감수성, 상상력의 원천이다. 이성과 기능주의의 부작용, 주관이나 객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낭만은 관성과 일상에 젖은 부부에겐 아주 좋은 특효약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익명의 편지를 보내 관계회복을 시도한다. 하지만 남편은 두 가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내가 익명의 편지를 받은 사실을 자신에게 고백할 것과 편지를 보낸 자신을 눈치챌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아내는 달랐다.

익명의 편지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낳는다. 아내는 다른 곳을 보고, 다른 남자를 상상하며, 그 사실을 숨긴다. 낭만이 부부의 간극에 개입해 가식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결혼제도를 영화적 시선으로 전복시킨다.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쓰고,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연출 또한 전복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스토리만큼은 아니다.

낭만은 가상이다. 가상일 때 더욱 흥분되고, 섬뜩하다. 하지만 낭만은 전복의 의미를 지니게 되면 가식과 위장으로 점철된 삶의 속살을 보여준다. 현실은 아름다움으로 가장된 경우가 많다. 백조가 우아한 자태로 수면 위에 떠 있지만 물 밑에서는 죽어라 물질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영화의 낭만은 결혼이 마치 행복을 보장해주는 만능열쇠라는 착각을 전복을 통해 솎아낸다.

그런데 삶의 무게는 모두 남편의 몫이다. 남편은 이 편지를 계기로 서로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여실히 느낀다. 그리고 남편은 왜 아내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를 스스로 자책하고, 부부라는 관계의 치명적인 결함을 깨닫지 못했던 순진함을 반성한다.

“부부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다.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개인의 의식이나 취향은 따로 간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장담하지만 속내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는 선의로 시작한 손편지가 갈등과 악의로 변해간다. 하지만 밖으로 갈등을 표출하지 않는다. 잠수복을 입고 해저를 탐험하는 것처럼 심리의 밑바닥까지 파고든다. 해저도 새까맣듯이 이 영화도 새까맣다.”

적당히 개인을 노출하면서 은밀한 비밀을 지켜나가는 것이 때론 가정을 지키는 책임일 수 있다.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유대감을 쌓는 것은 외롭고 가난해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사투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 숨기는 부부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영화의 엔딩이다. 이 영화는 결혼과 부부 사이에 연루된 억압구조를 해체하지 못한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콤플렉스,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한 부부의 트라우마를 진정으로 치유하지 못한다. 결혼식의 주례사처럼 누구나 사는 방식대로 ‘잘 살자’고 성찰하면서 끝내버린다.

“영화의 엔딩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나도 고민이 많았다. 부부의 오해를 풀면 신파가 될 것 같고, 파국으로 몰고 가면 비정했다. 아내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 쇼가 돼버린다. 관객들이 장난하느냐고 할 것이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심리적 거리감에서도 그 이면에 있는 현실적인 사랑과 부부애, 정, 관계성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서로 이해하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이야기다. 평생을 순애보처럼 사는 부부도 있지만 대부분 처음 만나 불꽃이 튀는 것처럼 살지 못한다.”

처음 최위안 감독이 안정효의 소설을 각색했다고 했을 때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같은 진한 감동을 기대했다. 개인적으로 <은마는 오지 않는다>를 한국영화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영화로 꼽기 때문이다. 또 <낭만파 남편의 편지>라는 소설을 읽지 않은 탓도 있었다.

“감독은 영화를 창작하고 연출하는 사람인데, 엄밀하게 보면 창작자라기보다는 전달자에 가깝다. 좋은 소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다. 여러 이야기들 중에 유난히 와닿는 이야기가 있다. 안정효의 소설은 부부 심리의 섬세함, 섬뜩할 정도의 디테일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맛깔스럽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해 영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안정효의 소설은 영화로서 중요한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최 감독의 형식과 언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세트로 활용한 좁은 연극 무대, 모노드라마처럼 무대에서 대사도 없이 감정연기를 하는 배우와 내레이션, 편지와 낭만이라는 잊힌 단어들을 발굴한 점 등이다.

한편으로는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최 감독의 독창성이 평가절하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는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아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부담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최 감독은 단 7회 차 촬영으로 끝낼 수 있도록 빈틈없이 일정을 잡았고, 친한 선후배 스태프들의 도움을 빌려야 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스튜디오 방식으로 100% 제한된 공간에서 작품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대학로의 소극장을 세트로 사용했다. 13평의 무대는 아파트광장, 도로, 지하철 안, 시장이, 사무실, 카페, 침대, 화장실 등으로 변했다.

“소극장이라는 빈 공간을 사용해서 무한상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무한상상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만약 재원이 있었더라면 13평이 아니라 300평 정도의 공간에서 또 다른 볼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배우를 비롯해 많은 스텝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이 영화는 둔탁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풍부한 내레이션이 라디오를 듣는 게 아니라 보는 느낌을 주었고, 리얼리즘을 연극과 같은 무대로 옮겨 환상적으로 치환했다. 특히 동어를 반복하는 볼레로 기법은 색다른 감흥을 선사했다. 이 영화에서 남편은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반복하고 아내는 심심하다를 계속 반복한다. 또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그것을 하고, 무엇도 하는 식이다. 최 감독은 이러한 언어유희를 최대한 강조하기 위해 내레이션을 소설 원문으로 활용했다.

이 영화의 크레딧에는 영화 <301, 302>, <산부인과> 등을 작품을 만든 故 박철수 감독의 이름이 뜬다. 박 감독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박 감독과 최 감독의 인연은 각별하다. 두 사람은 모두 드라마 프로듀서 출신이다. 최 감독이 영화 <저녁의 게임>으로 제19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했을 때, 박 감독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최위안 감독은 충무로에서 짧게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1985년 KBS에 드라마 촬영감독으로 입사해 KBS노동조합 초대부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1992년 MBC프로덕션에서 드라마 PD로 연출을 맡다 2003년 영화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방송국을 그만뒀다. 그리고 2007년 영화 <저녁의 게임>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는 공중파다. 심의규정도 다르고, 매체가 갖는 특성도 다르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드라마PD를 그만두고 영화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투자가 안 되면 작업을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은 주류 시각에서 벗어나 있거나 다르다. 내가 주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영화도 내레이션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최 감독의 세계관과 감성은 남성 위주다. 그는 남성을 과감히 드러낸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나약함까지 모두 꺼내고, 의연한 남성상을 깨부수며 연민한다. 또 남성을 삶의 엉킨 부분을 푸는 주제로, 해답을 제시하는 해결사 또는 희망의 전도사로 표현한다.

최 감독은 영화 <저녁의 게임>에서도 남성을 지독하게 연민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끔찍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녀의 아픔과 상처는 가슴을 아리게 하고, 그 아린 틈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희비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인간의 슬픔과 기쁨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 삶 자체가 슬픔이자 기쁨이며, 끔찍한 일상의 반복에도 어쩔 수 없이 담담하게 이겨내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트럭을 타고 숨어 들어온 한 남자, 그 알몸의 남자에게 그녀를 찬란한 낭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긴다. 또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 자신을 폭행해 귀를 멀게 한 그의 성기를 닦아주면서 남성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 뒤에는 여성을 억압해왔던 자기반성과 여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던 남성의 책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남자일지 모르지만 여자인 아내의 심리가 주가 된다. 현대 사회의 중심은 여자다. 여성이 주인이다. 잘못 보이면 안 된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