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까밀 리와인드'는 오프닝부터 의미심장하다. 1초, 아니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이어지는지 보여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예시한다.
오프닝의 의미는 영화를 다 본 후에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술, 담배, 고양이, 연기, 깃털들이 왜 슬로우모션으로 검은 스크린에 떠다니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그저 톡톡 튀는 음악과 감각적인 영상으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뒤에는 무릎을 치게 된다. 오프닝은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을 함의하며,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 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고, 삶은 아름답게 채워진다고 은유한다. 오프닝은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순간순간을 느린 화면으로 재생한다. 물론 감독의 의도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화법으로 읽힌다. 특히 노에미 르보브스키 감독이 작은 금은방시계방 주인을 통해 1초의 시간을 반복하거나, 반지로 미래를 암시하는 점은 눈여겨볼만하다.
영화 까밀 리와인드는 세 가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다. 주인공 까밀이 이 소설을 봤다면 아마도 과거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르바는 유쾌하다. 그는 무엇이든지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언제나 능동적이고 즐겁다. 하지만 까밀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작은 일조차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굴레에 갇혀 있거나 걱정만 떠안고 사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까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다. 마흔이 넘어서도 자신을 형틀에 가둔다. 먹고살기 위해 삼류배우를 하고, 풀리지 않은 숙제는 술로 풀며, 인간 관계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또 자신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걱정의 원인은 남에게만 찾는다. 그러니 까밀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까밀의 과거 여행을 통해 사사로운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주위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길 권한다. 그래야만 원숙한 정신세계로 인도되고, 현실의 고통에도 당당하게 싸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삶은 살아가면서 만들어지고, 끝없는 변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삶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까밀 리와인드는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써니'와 겹친다. 워크맨, 디스코 음악, 구슬사탕팔찌 등 1980년대 복고스타일과 소녀들의 거침없는 질풍노도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써니와 확실히 다르다. 써니가 친구의 죽음을 통해 과거의 인연을 찾아 나서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렸다면, 이 영화는 파티 도중 정신을 잃은 뒤 25년 전으로 돌아가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설정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써니보다 현실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써니보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40대 여배우가 연기하는 10대는 어색하다기보다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고, 이 영화의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까밀은 16살로 돌아가 과거에 해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새롭게 시도한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밤에 수영장에 몰래 들어가 술을 마시고, 수업 도중에 교사의 수업방식에 항의하며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또 같은 학교 친구와 닭살 돋는 섹스도 시도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까밀은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영화 후반에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는 베토벤의 클래식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도 떠올리게 했다. 그 이유는 영속적이지 않은 인간의 삶 때문이다. 베토벤은 사랑하는 여인 엘리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고 이 곡을 만들었다. 사랑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추억을 기억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서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고 흘러가며,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빼앗는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삶은 의미가 없다. 쾌락을 모르는 절제가, 미움을 모르는 사랑이 어찌 의미가 있겠는가. 까밀은 한 달 뒤 뇌졸중으로 죽게 되는 어머니를 살려보기 위해 유난을 떨지만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고 실룩댄다. 까밀은 어머니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까밀은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시간과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을 느끼며 삶의 진중함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까밀은 힘겨운 인생살이가 주는 눈물은 고통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기쁨을 진정으로 헤아리게 만드는 묘약이라는 것을 배운다. 영화 도입부에 담배 연기와 알코올, 그리고 불만에 찌든 채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비틀거리는 까밀이 마지막 장면에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변한 것은 어찌 보면 이 영화의 고갱이라 하겠다.
일상이 무료하다면, 주위 사람들이 귀찮다면,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이 영화를 보자. 뭔가 불만족과 불안, 불성실한 여러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할 막막함을 느꼈다면 이 영화 꼭 보자. 특히 써니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봐야 할 영화다.
'이야기 > 그래 그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국열차 - 새로운 세상을 향한 봉준호 감독의 열망 ‘계급해방’ (0) | 2022.10.09 |
---|---|
토니 스토리: 깡통제국의 비밀 - 재활용 판타지 어드벤처, 토마스 보덴스타인 감독 2013년작 (0) | 2022.10.08 |
마지막 4중주 - 예술과 삶, 늙음에 관한 성찰, 야론 질버먼 감독 2012년작 (0) | 2022.10.08 |
감시자들 - 감시와 불법사찰 사이...불감증을 느끼는가? 조의석, 김병서 감독 2013년작 (0) | 2022.10.08 |
라쇼몽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구로자와 아키라(Kurosawa Akira) 감독 1950년작 (0) | 202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