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그래 그 영화

라쇼몽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구로자와 아키라(Kurosawa Akira) 감독 1950년작

이동권 2022. 10. 8. 21:42

라쇼몽(羅生門), 구로자와 아키라(Kurosawa Akira) 감독 1950년작


영화 '라쇼몽'은 첫 장면부터 극도의 몰입을 선사한다. 천둥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폭우, 머릿속을 후벼 파는 음악, 몽환적인 등장인물, 삶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것 같은 문까지 바로 앞의 상황마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분위기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와 상통한다.

라쇼몽은 교토에 들어가는 관문의 이름이다. 이곳에 스님과 나무꾼, 그리고 한 남자가 모여 마을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사건에 대해 얘기한다. 나무꾼은 나무를 하러 숲에 들어갔다가 도적에게 죽은 사무라이를 발견한다. 나무꾼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달음에 관청에 달려가 신고한다. 관청에 나무꾼과 도적, 사무라이의 아내와 사무라이의 혼을 불러낼 수 있는 무당이 불려 와 심문을 당한다. 하지만 사건 해결은 난항을 겪는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네 사람의 진술이 크게 달랐기 때문.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자신이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주인공들로 물질과 탐욕에 눈이 먼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춰보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마치 살인 장면의 목격자가 돼 극 중에 등장하는 착각에 빠진다. 나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진술했는지 대입해보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성찰하면서 마음은 무거워지고 고개를 떨구게 된다.

이 영화는 객관적 진리에 대해 부조리했던 조국, 욕망을 채우기 위해 판단력을 잃어버린 일본을 비유하면서 일본 사회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꼬집는다.

이 영화는 1950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시절의 영화 같지 않다. 기발한 스토리 못지않은 영화기법과 역동적인 연출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원래 스토리에 4개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 4개의 스토리는 플래시백 기법(회상하는 장면)으로 삽입되고 엉키면서 진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이러한 종류의 혼돈을 정신학에서는 '라쇼몬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각자의 기억이 서로 엇갈리지만 그 각각이 모두 개연성을 가지는 기억의 주관성 이론이다.

영화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하시모토 시노부가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소설 '라쇼몬'과 '덤불 속에서'를 각색해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51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그랑프리(황금사자상)과 1952년 미국 아카데미상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영화는 1964년 아울레이지, 1991년 아이언 메이즈, 1996년 미스티 등의 영화로 리메이크됐고, 연극과 뮤지컬 등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이름 구로사와 아키라. 그는 50년대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은 사랑과 재미, 애국심만을 추종하는 당시 일본 영화와는 달랐다. 그는 인간 탐구, 사회 개조, 새로운 세상을 대한 열망 등을 영화로 표출했다. 또 스토리에만 매달리지 않고 영화적으로도 완벽을 추구했다.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미적으로 떨어져 훼손되지 않도록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데 경주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예술세계는 그의 과거를 보면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다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에 참여해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 미술을 했다. 이것은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를 표현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빈곤과 차별 등 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가 모두 사회체제에 있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체제변혁을 염원했다. 이후 그는 미술에서 영화로 진로를 바꿔 감독이 됐다. 이런 경험과 경력은 그의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일본이나 일본 영화에 거부감이 있는 국내 영화팬들도 구로사와 아키라를 대놓고 싫어하지는 못한다.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사회구조의 모순과 인본주의에 대한 끈질긴 탐구로 많은 영화 팬들에게 지혜와 감동,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선사해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은 예술과 영화, 우리 사회의 진보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칭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