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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중주 - 예술과 삶, 늙음에 관한 성찰, 야론 질버먼 감독 2012년작

이동권 2022. 10. 8. 22:17

마지막 4중주(A Late Quartet), 야론 질버먼(Yaron Zilberman) 감독 2012년작


자연스럽다. 조용하다. 섬세하고 예민하며 격정적이다. 예술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

영화 ‘마지막 4중주’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는 힘들겠다. 굳이 설명하라면 베토벤을 우상으로 생각하며, 음악가의 길을 걷고 싶었던 개인적인 꿈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고된 노동과 인내의 시간을 감내하는 예술가들의 투혼과 늙음에 대한 성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를 위해 삶을 완전하게 헌신한 적이 있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완벽하게 동화된 적이 있었을까. 이 영화는 지금 대답을 원한다. 늙고 병들어서가 아닌 지금에.

세계적인 현악4중주단 ‘푸가’. 25주년 기념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파킨슨병에 잠식당하는 첼리스트 피터에게 더 이상 연주는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팀을 중요시했고 현실에 충실했다. 오직 하나의 길밖에 몰랐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동자에 깃들어가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게 마련이었다.

피터의 파킨슨병은 미래가 창창한 세 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는 계기가 됐다. 현악4중주단 ‘푸가’는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등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들은 25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팀의 정신적인 멘토라 할 수 있는 피터가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팀원들은 25년 동안 인내해왔던 감정을 드러낸다. 사랑, 감정, 불만을 쏟아내면서 25년의 역사를 뒤흔들어버린다.

이들은 젊었다. 얼마든지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은 조각이 났고, 25년의 역사는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반면 피터는 늙었다. 더 이상 다른 삶도, 미래도 없었다. 단지 푸가가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인생의 완성이었다. 피터는 팀이 해체위기까지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이들에게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몇 가지 비상처방을 내린다. 그중 하나가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이다.

이 영화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에 집착한다. 그 이유는 이 곡이 ‘작곡가가 도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연주되도록 구성된 점’ 때문이다. 이 곡은 자연스럽게 ‘푸가’의 역할과 운명을 함의한다. 베토벤은 이 곡을 자신의 현악 4중주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슈베르트는 1828년 10월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이 곡을 듣고 너무나 흥분해 지인들이 걱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곡은 형식에서 진보적이다. 기존의 4악장 구성이 아니라 7악장으로 구성됐으며, 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연주하도록 했다. 이 곡은 베토벤의 깊은 사색과 부드러운 서정, 엄격한 정신이 잘 드러난다.

결성 25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현악4중주 ‘푸가’의 역사는 모두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시간이었다. 25년을 면도날처럼 정확한 음정과 박자, 음색을 내기 위해 훈련했고, 어떤 불협화음에서도 자신을 통제하며 공연을 해왔다. 그래서 그 시간들은 단순히 ‘과거’라고 표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투신한 삶 자체였고, 일상이 과거의 현존이었으며, 팀원 모두가 역사의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오직 늙고 쇠약해진 피터만이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젊고 총기 있는 팀원들은 아니었다.

시간이 쌓여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젊음을 헌신하는 것이다. 순결을 잃어가지만 침착해지고, 사랑의 입맞춤보다는 작은 어깨동무가 그리우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떠나 운명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리고 온전히 마음을 가라앉힌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기쁨이 타인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헤아림도 커지는 것. 하지만 모든 늙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젊음을 믿음과 사랑, 헌신으로 채운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욕망의 대가로 지불한 사람들에게는 늙음, 나이 들음 또한 욕망의 불꽃에 불과하다. 환희와 쾌락의 노예로 남아 거기에서 호흡하고 머무르다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맞고 만다.

역사는 움직인다. 지켜내면 희망이 되지만 지켜내지 못하면 비극이 된다. 푸가는 피터의 노력을 발판 삼아 역사를 희망으로 다시 쓴다. 고통의 터널을 뚫고 나와 함께 무대에 선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공연을 포기할만한 상황이다. 사건이 엉망진창 꼬인 데다 감성이 풍부한 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25주년 기념 공연을 성사시켰다. 그것 하나만으로 이들의 여정은 위대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피터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서글프고 외로운 영혼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지목이 되는 사람. 삶은 오직 사랑과 헌신을 통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늙음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를 살아가는 힘은 진정한 헌신과 이해가 바탕이 된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나이 들음은 아름다움으로 물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