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구 선생은 꼿꼿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수다를 떨고 가는 이유는 강직함 뒤에 숨어 있는 정겨운 마음씨 때문. 그의 교육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교육자의 권위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 이전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우선이다. 그는 최근 책 '수메르 문명과 히브리 신화'를 펴냈다. 10여 년 전 나와 만났을 때 내겠노라고 얘기했던 책이다.
이 선생은 술을 좋아한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술이 좋아 마시긴 해도, 사람이 좋아 마시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대부분. ‘전국국어교사모임’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던 젊은 시절에는 술 때문에 꽤나 몸도 힘들었단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교사들과 마음을 꺼내놓고 얘기하는데 술만 한 게 없어서다.
그와의 대화는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서 시작됐다. 내 손에 우산이 들려 있건만 그는 귀찮지도 않은지 자신의 우산을 나에게 씌어주면서 "오랜만"이라고 먼저 말을 붙였다.
“작년에 우리 집 텃밭에서 수확한 옥수수 한 개에 수 백 개의 옥수수 씨알이 달려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 옥수수를 개량해 기근이 든 아프리카와 굶주리는 북한에 보낸 어떤 생물학자가 기억납니다.(웃음)”
이원구 선생은 1946년 전국 삼례 와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전주이씨 후손들이 전주유씨와 함께 집성촌을 이룬 제법 큰 농촌마을이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집결지였다. 이곳에서는 송혜옥이 근동의 농민군 5,000명을 이끌고 갑오년에 봉기에 참여했다. 그 후 일제 때 와리 부락은 완주군 농민운동의 본거지였고, 해방 공간에서 민족자주, 통일 운동의 선봉에 섰던 곳이라 연좌제에 걸려 핍박을 많이 받기도 했다.
“외고조부는 전북 장수 지방의 부유한 유림인데, 동학농민혁명의 장수지역 주동자로 참여했다 고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민보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습니다. 외고조모는 남편의 시신을 밤에 장수의 봉황산에 암매장하고 전북 고부군 덕천면 신월리로 피신해 아들 하나를 양자 보내고 구차하게 살다가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 뒤 그 후손들은 백제 후기의 별궁인 금마의 미륵산 근처로 흘러들어왔는데, 외조부는 특수한 쟁기를 개발해 부자가 됐지만 장남의 행방불명과 우익들의 행패로 쓰러져 집안이 풍비박산됐고, 자식들은 불행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이 선생의 집안은 사연이 복잡하다. 아버지의 형제 셋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친 삼촌 셋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큰삼촌은 열사, 둘째 삼촌은 의용군, 그리고 셋째 삼촌은 학도병으로 전사했습니다.”
이원구 선생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고 조용한 어르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선생은 부모님께 별다른 걱정을 끼치지 않고 유순하게 자라 공고에 진학했다. 공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선생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겹겹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한숨과 불호령에도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 없었다.
“일종의 실존적 결단을 내렸던 거지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싶었던 거랄까요. 단 한 번뿐인 삶을 영원화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문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이 선생은 197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교사로 일하면서 선생의 사명감을 깨닫게 됐다. 그 당시 학생들은 학내의 여러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교사들과 다르게 폭력을 거부하면서 나름대로의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다가 그는 광주항쟁을 지켜보면서 시인이나 작가의 명성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선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예수나 석가 같은 위대한 선생들이 인간을 크게 깨어나게 한 것처럼 진정한 교사는 학생들을 다소나마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의 선생들은 학생 위에 군림했습니다. 국어 시간에 선생들은 일방적으로 설명하고 학생들은 그저 듣고 필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퇴직할 때가 되니까 학생들은 자유가 지나쳐 방종에 흘렀습니다. 선생이 좀 잘해주면 저희들 마음대로 하고, 선생이 좀 엄숙하면 끊임없이 졸았으니까요. 진정한 사제관계가 무너져 교실이 붕괴됐다고 봐야지요.”
그는 건강한 인성교육과 함께 국어교육의 전문성을 향상하기 위해 ‘전국국어교사모임’ 창립을 도왔고, 창립 회장이 됐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올바른 국어교육을 위해 1989년에 창립된 조직으로, 선진수업방법이나 학교문화를 교류하는 진보적인 연구 단체였다. 그에게 어떻게 하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이 만들어졌고, 어떻게 하다 창립회장이 됐느냐고 물으니 고개부터 숙인다.
“저는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투철한 교육관이 서 있는 사범대학 출신도 아니고 더구나 훌륭한 선생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좀 열성적이고 개혁적인 국어선생에 불과했는데, 당시 이름 있는 이수호, 김진경, 도종환, 이상석, 김은형 선생들보다 제 나이가 좀 위였거든요. 그래서 회장으로 추대를 받아 4년간 선생님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됐습니다.”
그는 전국국어교사모임 활동을 하면서 민족문학교과서를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 당시 국어 교과서는 미국의 신비평 이론에 바탕을 둬 좀 편향적이었다. 그 이론 대로라면 얼마든지 반민족적인 작가나 시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로 대학원 출신의 고등학교 국어 선생들이 중심이 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문학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민족문학 교과서’를 편찬하는 모임을 꾸렸고, 거기에 대략 3년 정도 참여했다. 결국 친일잔재, 반공이데올로기 등 반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어용문인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남북의 진정한 작품들과 한문으로 된 뛰어난 작품까지 폭넓게 수용한 실험적인 교과서, ‘민족문학’이 탄생했다.
그는 또 학교 내에서 뭔가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교내 ‘텃밭 가꾸기’가 가장 대표적인 실천이었다.
“1990년대 초에 학교는 지식과 교사 중심에서 생활과 학생중심으로 교육과정이 개편됐습니다. 국어도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중심으로 교과서가 혁신적으로 달라지고, 전교조 외관단체로 ‘전국국어교사모임’이 발족되면서 저희 학교에서 오래전부터 해오던 특별활동, 학급문집 제작, 문학 활동, 답사여행, 교지 제작 등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열린 교육의 하나로 학교의 빈 터에 텃밭을 만들어 학급에 분양하고 야생화를 기르는 일이 각광을 받게 됐습니다. 유월이 돼야 보리가 익듯이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만, 오래전부터 저는 국어 시간에 참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요즘 대안학교에서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남으면 저런 일까지 하느냐?’는 비아냥이었다. 10여 년 간 동료 교사,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100여 종의 야생화를 길렀는데도 그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이빨만 가지고 하는 교육보다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인성교육이 가치가 있다’는 경험담을 수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들꽃학교 노교사 교육희망을 보다’다.
그는 학교를 떠날 때가 되자 30년 동안 여학교에서 여성들의 자유를 위해 인간과 문학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번민한 밤이 많았다. 그래서 가까운 제자들, 문학을 사랑한 제자들, 불행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정리해서 퇴직하던 해에 ‘들꽃학교 문학시간’을 냈다.
젊은이들은 입시 걱정, 등록금 걱정, 취업 걱정 때문에 피가 말라간다. 그가 던져주는 ‘힐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비무장지대 철책에서 야간 잠복근무, 후방에서 진지 구축 작업, 높은 산에서의 피가 마르는 벙커작업, 그리고 소총부대 분대장을 하면서 냉혹한 군대문화를 3년간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 비인간적인 체험이 살아가는데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여러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어른이 되려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빚쟁이들이고, 주로 공무원이 희망직업이고, 돈이 없으면 결혼도 못한다는 현실적인 비극 앞에선 할 말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스웨덴 사람들이 어떻게 지혜를 모아 사회민주주의를 만들어 세계적인 칭송을 받는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저 같은 국어 선생 출신이 무슨 깊은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쾌락과 고통은 형제 간이다, 자잘한 욕심은 버리고 큰 욕심을 가지고 살자, 삶의 질을 깊게 만들자, 좀 고귀한 삶을 추구하자,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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