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김태흥 감정노동연구소 소장 - 산다는 것 자체가 감정노동

이동권 2022. 9. 27. 23:48

김태흥 감정노동연구소 소장

 

현대인들은 대부분 아홉 시에 출근해서 여섯 시에 퇴근하고, 적당히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고, 건강에 엄살을 떨며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며 일생을 살아간다. 어떤 경우에는 오로지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와 이기적인 사회적 관계에 빠져 적당히 미화하고 적당히 대처하며 적당히 즐기는, 적당한 삶을 살고 있다.

김 소장은 달랐다. ‘자본의 총아’라 할 수 있는 광고대행사에 다니면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왔지만 감정노동자들의 뼈아픈 현실을 알고 나서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감정노동연구소도 설립했고 사람을 잡는 감정노동, ‘거기 누구 없소’라는 책도 냈다.

뭔가에 사랑을 쏟거나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안다’는 말과 같다. 사랑과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으면 말로만 부르짖는 사랑이요 관심일 뿐이다. 김 소장은 먹고살기에도 바쁜 삶이지만 끊임없이 알아가고, 끊임없이 알려가고 있다. 

김태흥 감정노동연구소 소장은 서울 토박이다. 소위 고집 세기로 유명한 ‘58년 개띠’다. 용모는 매우 모범생 같다. 눈빛도 초롱초롱 빛나고, 대화에도 매우 열정적으로 임한다. 하지만 김 소장은 고등학교 때 싸움과 술 담배 때문에 정학을 두 번이나 당했다며 손사래를 친다. 모범생이라는 말이 어색하단다.

“술 담배는 중학교 때부터 했다. 배구 명문인 인창중학교 응원단에 들어가면서 선배들에게 술 담배를 배웠다. 내가 응원단장을 했다.”

혈기가 넘치는 그 시절에는 펜팔과 록음악을 낭만으로, 술과 담배를 인생의 훈장처럼 여기는 조숙한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 공부에 소질이 없거나 일찍 성에 눈을 뜬 학생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김 소장은 술 담배를 즐기기도 했지만 공부도 곧잘 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피’나 인텔리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북한이다. 공무원을 하다 사업에 손을 댔지만 그렇게 많은 재미는 보지 못했다. 가정 형편은 중하 정도였던 것 같다.”

김 소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생운동에 눈을 떴고, 교회를 근거지로 운동을 시작했다. 70년대 말은 유신시절이어서 매우 엄혹했다. 전두환 정권 때와는 달리 앞에 나서서 데모하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주로 스터디 그룹을 중심으로 운동을 했다. 그러다 김 소장은 1980년, 대학교 4학년 때 결혼을 했다. 매우 이른 결혼이었고, 운동도 접었다.

“취직을 할 때 이미 아이가 둘이나 됐다.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 먹여 살리기도 벅찼다.”

김 소장은 이후 오리콤에 취직했다. 오리콤은 한국 최초 종합광고대행사로 1967년 합동통신사 광고기획실이 모체인 두산그룹 계열의 회사다.

김 소장은 회사에 다니면서 ‘광고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활달하고 창의적인 성격이 광고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는 회사에서 AE(account executive)로 일했는데, AE는 광고주를 위한 광고 계획을 수립하고 광고주를 대신해 광고주의 광고 활동을 기획하는 사람이다.

김 소장이 기획한 광고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광고는 삼양라면 광고다. 삼양라면은 1963년에 생산된 한국 최초의 라면이었고, 오랫동안 대한민국 라면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89년 삼양식품을 비롯한 일부 회사가 공업용 우지를 이용했다는 ‘우지파동’ 사건으로 매출이 급감했다. 1995년 이 사건은 무죄로 결론이 났지만 라면시장 점유율은 10%대로 추락했다.

“삼양라면이 우지파동으로 망할 지경까지 갔다. 그 여파 때문인지 1990년대 광고를 계속해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 광고를 내가 맡아서 진행했다. 1년 사이에 매출이 3배나 늘었다.”

김 소장이 만든 광고는 개그맨 이휘재가 비 내리는 날, 비를 맞으며 연인 찾아가자, 그녀가 흠뻑 젖은 그를 위해 삼양라면을 내놓는 스토리의 광고다. 배경음악은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가 사용됐다.

이후 이름이 알려진 김 소장은 여러 광고회사를 옮겨 다니며 일했다.

“광고회사는 살얼음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다. 경쟁도 심하다.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망가지면 통째로 회사가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거손기획’이라고, 기아 광고를 하던 회사가 있었는데 무척 큰 회사였다. 재벌 계열사가 아닌 독립 광고대행사지만 꽤 알아줬다. 하지만 IMF 때 기아가 무너지니까 함께 날아갔다. 이 세계가 그렇다.”

광고업계에서는 마흔 살이 되면 할아버지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김 소장은 쉰 살까지 광고업계에서 일했다. 광고에 대한 남다른 소질과 성과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고업계를 떠난 뒤 그는 본업을 접고 공인중개사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광고회사에서 일할 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부동산은 노하우가 있는 곳이 아니라 그냥 돈을 버는 곳이다.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더라. 광고회사 다닐 때는 밤새 일해도 성취감, 만족감 같은 게 있었는데 공인중개사는 부동산을 소개해주고 수수료 챙겨 먹는 직업이라서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부동산을 하니까 집사람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계속 폼 나게 살기를 바라더라.”

김 소장은 공인중개사를 하면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보람이 있는 일을 찾았다. 공허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런 와중에 그는 ‘감정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독서량이 굉장히 많다. 책을 좋아한다. 책 중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책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행동과 마음, 영혼에 대해 궁금함이 많았다. 그러다 감정노동을 알게 됐다. 내가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면 그냥 듣고 넘어갔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김 소장에게 있어 감정노동은 정말 심각하고 폭발력이 강한 주제였다.

“한국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800~1,000만에 이른다. 마트, 백화점, KT수리기자, AS기사 등 직종도 매우 다양하다. 이들은 고객들이 부당하게 나와도 찍소리도 못한 채 일한다. 그래서 우울증, 대인기피증과 같은 정신장애를 앓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살까지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백화점 노동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심리상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중 32.7%가 지금 즉시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을 정도로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회는, 본인들은 그것이 감정노동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정말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다.”

김 소장은 책, ‘거기 누구 없소’를 냈다. 처음에는 감정노동에 관해 강의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감정노동을 설명해주는 앨리 러셀 혹실드의 책이 너무 어려웠다.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감정노동을 쉽게 알릴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김 소장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감정 노동자들을 위해서다. 그는 감정노동으로 망가진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특히 감정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파견직, 여성 노동자들로,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웠다.

“‘진상’ 손님이 오면 영혼이 파괴되고 ‘멘붕’이 온다. 화가 나도 웃어야 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내상을 입어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이처럼 큰 충격이 왔을 때 마음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현장에서 마음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제도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다.

그중 하나는 ‘감정노동방어권’이다. 이 용어는 김 소장이 만든 용어로, 손님 때문에 멘붕을 당한 상황이 오면 회사에서 교육받은 것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다.

“이런 일이 있었다. 마트 시식코너에 손님이 와서 침을 뱉었다. 이 따위 고기를 손님이 먹으라고 하느냐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시식코너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너무 놀랐지만 ‘손님 죄송합니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장판은 30분가량 계속됐다. 결국 관리자가 나와서 아주머니에게 ‘맛없게 고기를 구워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시켰다. 아주머니는 그 충격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마트도 그만뒀다.”

명백한 고객의 잘못이라면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바로 ‘감정노동 방어권’이다.

“텔레마케터에 대한 성희롱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객이 성희롱을 해도 먼저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 XX를 찢어 죽여버리겠다고 욕을 해도 듣고 있어야 한다. 이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몰래 끊을 수도 없다. 그래서 텔레마케터들의 90%가 3개월 만에 이직한다.”

김 소장은 감정노동자들에게 ‘감정노동휴식권’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감정노동자들이 쉴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하고, 제대로 된 휴게실 하나 없이 계단에서 쉬는 이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끝으로 김 소장은 ‘산다는 것’ 자체도 감정노동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감정노동이다. 왜냐면 사는 동안 관계 속에서 감정노동을 한다. 자기의 감정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연출하는 것이다. 이를 깨닫고 마인드컨트롤을 할 수 있다면 삶에서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