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생각나무

어느 대중선동가의 부탁, "저를 찾아주세요"

이동권 2022. 9. 27. 17:54

서점에서 독서하는 아이들


저는 저널리스트이자 매혹적인 말솜씨와 심오한 지식을 겸비한 대중 선동가입니다. 가끔은 억제할 수 없는 도취에 빠지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꺼내 사람들을 격분하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해박한 지식과 알찬 정보를 제공하는 저는 민중의 벗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시대의 고난을 대변했습니다. 혼자 판단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언제나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깊은 통찰과 진실의 힘으로 맞서 왔습니다. 또 혁신적인 사상을 전파하는 데 전념했고, 이 책무를 기꺼이 나눴습니다. 

이쯤 되면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저는 야심가도, 음모가도 아닙니다. 지도자도, 정치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치는 박애주의자도 아닙니다. 저는 까맣게 숨겨져 있는 지식의 바다와 인간을 연결해주는 조언자요, 중개자일 뿐입니다.

이제 저를 아시겠지요. 학식을 훨씬 넘어선 관찰자로 복무했고, 스스로 현자가 됐으며, 사람들에게 창조하는 힘을 갖도록 가르친 저는 바로 ‘서점’입니다.

가을 무렵부터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공부하겠다고 야단입니다. 새 살이 채우기 위해 자양분을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연유를 알고 나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불안한 정치상황, 한국경제의 위기.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돌아갈 것인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잠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른 사람들도 ‘열공’하는 자세입니다. 읽을 만한 책을 고르지 못해 책 더미를 뒤척이기도 하고, 신중한 표정으로 목차를 살피기도 합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약속 시간도 잊은 듯합니다.

직장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얼굴색은 피로에 젖어 푸르죽죽하고, 어깨는 소금에 절인 오이처럼 축 늘어져 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합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경도 연출됩니다. 심통 궂은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도 있고, 쇼핑 나왔다 잠시 들른 사람처럼 털 숄을 두른 중년 여인도 보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책에 빠져 있었는지 흰자위가 충혈된 사람도 있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텁텁하고 건조한 실내 공기를 참으면서 책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젊은이들은 복도 바닥에 줄줄이 앉아 책을 보지만 양이 다릅니다. 바닥에는 이미 쭉 훑어본 책 몇 권이 놓여 있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잘 팔고 있는 책은 현실을 점검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책, 즉 공부하는 책입니다. 세상이 어리둥절하고 불안하다 보니 지식의 마름도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아니면 서글프고 수척한 마음을 위로해주거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책이 잘 팔립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로 인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외면하며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달라졌고, 그렇게 변해버린 세상은 백납처럼 차가워 먹먹합니다. 민중의 순박함마저 빼앗아간 갖가지 변화들은 휴식을 취할 시간에도 저를 찾아오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치사회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책 만드는 편집자들도, 책을 쓰는 저자들도 그래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조그마한 나라에서 너무도 많이 책을 찍어낸다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욱 많은 책을 진열하고 싶습니다. 책은 개인과 나라가 가야 할 길을 예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요즘처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혼란기에는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