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생각나무

컴퓨터 디자이너는 창의적인 직업 NO! 노가다 YES!

이동권 2022. 9. 30. 15:25

나병호 UI 디자이너

컴퓨터 디자인이 잠재력 있는 일자리로 인정받는 시기는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디자이너들은 누구나 그것을 화제 삼아 얘기했으며, 이제는 엄동을 대비해 땔감(다른 직업)을 마련해야 할 시기라고 꼬집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 인생의 막차를 타고 있다’라고 말했던 디자이너가 경력 10년 차의 베테랑이라는 사실이다.

디자이너들은 하루하루 창의적인 사고가 마비된 상태에서 과중한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생명인 이들에게는 ‘가사상태’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상실감은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꿈꿨던 ‘추측’들이 ‘현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시작됐다. 마치 미지의 것에 직면한 어린아이가 꼼짝하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모습 같다.


H사에서 UI(User Interface)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나병호 씨는 “디자이너는 창의적인 직업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관리자’ 때문에 괴리를 느끼고 있었으며 “디자이너라는 명함을 내밀고 있지만 한 번도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컨셉(Concept)을 잡을 때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려 보다가 이번 디자인에는 바다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우스를 잡죠. ‘근데 어떻게 표현하지’하고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작업이 더디거나 머리가 아플 때 쉬어야 합니다. 저는 주로 만화나 신문, 동영상을 보면서 상상력을 키웁니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이해를 못 합니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를 끼적거리고 있어야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작가의 전시를 보고 싶어도 생각뿐입니다. 그런 데 가면 놀러 간다고 여기거든요. 어떤 때는 프로그래머를 서포팅해주는 기술자처럼 여겨 속도 상합니다. 업무가 프로젝트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죠. 안타깝습니다.”

S사에서 웹(WEB) 디자이너로 일하는 김주연 씨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존심 때문에 웹디자이너를 창의적인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일지 모른다는 설명이다.


“처음 직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톡톡 튀고 멋진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2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사실 그대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예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매우 낮은 탓이에요. '대기업'에 다니는 게 '디자이너'라는 직업보다 더 먹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점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타성에 젖게 하는 가장 큰 이유고요. 산업디자인이나 환경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좀 다를 거예요. 디자인 자체가 자본이고 경쟁력이거든요. 웹디자인은 반복적이고, 일회적인 일이에요. 만든 지 하루도 못 돼 사라진 이미지들이 수두룩해요.”

D사에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는 박광호( 씨는 “눈도 아프고 어깨도 결린다”고 호소부터 한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씨름하다 보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는 것. 그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무섭다”면서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좀 더 비전 있는 일을 시작하려고요. 비전이라고 하니까 좀 그런데, 돈벌이가 변변치 않아서요. 매일 야근은 기본이에요. 마감 닥치면 날 새는 경우도 많고요. 또 출판, 광고 디자인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드니까 기념품이나 판촉용품, 봉투, 전단지, 스티커 같은 인쇄물들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잡다하죠.”

디자이너들은 여건만 된다면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했다. 회사를 차리거나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지 못할 바에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새로운 인생행로를 찾는 이들의 눈빛은 결연하기까지 하다.

나 씨는 올해 말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미적 감각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옷가게’를 열 계획이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로드맵을 그려보지 않았지만 미싱과 재단도 배웠다. 보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닙니다. 컬러에서 구성까지 클라이언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주면 되죠. 처음에는 제 디자인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컨셉에 맞지 않게 변형되고 복잡해지다 보면 만족감이 없어집니다. 허탈하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김 씨는 웹디자이너로 계속 일할 작정이다. 새롭게 일을 트는 것보다 대기업 직원이 훨씬 낫다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그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수 있는 언변 능력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웹디자인이 고상하고 창의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충고했다.

박 씨의 고민은 자신이 운영하는 디자인 사무실을 설립하는 것으로 굳은 듯했다. 다른 일이라고 해봤자 식당이나 슈퍼마켓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 그는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편집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보잘것없는 일로 치부되는 우리 사회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시인의 창조물인 도시가 이제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말끔하게 쓸어버리고 새로운 도시와 도시인들을 탄생시킨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일 보는 인터넷과 출판물들은 이미 존재하는 창조물들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거대한 괴물과 같은 자본의 메커니즘 앞에서 탄생은 이미 죽음이라는 운명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재능이 있어 쓰임이 있다면 잘 쓰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능력을 발현할 수 없는 구조에서 일이 잘 못되면 ‘디자인이 왜 그래’라고 타박만 늘어놓는 사람들은 너무도 야박하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를 각오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광화문 어느 빌딩 모퉁이를 돌아설 때 사방을 둘러보라. 디자이너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