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보다 이미지를 파는 시대가 도래했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아트 마케팅’이 급부상했다. 불꽃을 점화하자마자 활화산처럼 순식간에 폭발할 지경이다. 제품, 가격, 유통, 촉진 등을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든다는 마케팅의 정석 ‘마케팅믹스 4P전략’도 과거에나 ‘먹히는’ 단어다.
최근 기업들은 상품의 기능보다 영화, 음악, 게임, 전시 등 문화예술을 이용해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판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사용자들의 증가로 소비자들의 글이 브랜드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다양한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며,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업들은 명화를 이용한 ‘미술 마케팅’에 유독 관심이 많다.
한 백화점은 350억 원을 들여 국내외 유명 작가의 미술작품을 건물 내부에 배치했다.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을 휘어잡기 위해서다. 매장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해 갤러리처럼 꾸민 백화점도 있다. 패션업체들도 론칭(출시) 행사나 패션쇼에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옷에 미술작품을 문양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갤러리에서만 보던 미술작품을 직접 가지고 다닌다는 소비자들의 자부심을 간파한 마케팅이다. 최근 미술계에 돈이 많이 몰린 탓인지 은행들도 금융과 미술의 만남을 주제로 한 아트페어나 전시회를 개최해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미술과 비즈니스를 결합한 제품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유명한 그림을 제품에 적용시킨 ‘아티스틱 코스메틱’ 화장품이 대표적이다. 한 업체는 100만 원이 넘는 채화칠기 작품을 화장품 용기로 사용했으며, 용기에 유명 화가의 그림을 그려 넣어 멋을 더했다.
한 가전업체는 주방가전에 순수예술을 접목해 ‘갤러리 키친’을 표방하고 나섰고 한 제과업체는 국내 유명 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엽서로 제작해 넣고 세계 3대 미술관을 여행할 수 있는 이벤트를 실시했다. 이처럼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라이프사이클이 여가와 문화 향유에 맞춰지면서 미술을 마케팅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필연’이 돼가고 있다.
왜 아트 마케팅인가?
기업 경영의 핵심이 마케팅 부서 위주로 재편됐다. 마케팅 전략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기업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는 까닭이다. 상품 개발 못지않게 급변하는 시대를 앞지르는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쫄딱’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크다. 마케팅은 ‘인식의 싸움’이라는 말도 있듯이 기업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브랜드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마케팅은 곧 브랜드의 인지도를 고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예술은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미술’은 브랜드 이미지를 어필하고 각인시키는데 용이한 마케팅 도구다. 아직도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로 소비자의 구매의욕을 자극하는 전략이 유효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변수도 적지 않아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술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국내 한 전자업체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TV 신제품을 발표하는 이색 이벤트를 준비했다. 전시공간에 PDP TV를 설치하고 유명한 그림들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쇼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품을 선전하기 위해 TV를 박물관에 갖다 놓은 듯하다. 그러나 이 쇼는 PDP TV의 해상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알리는 동시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홍보효과를 톡톡히 해냈다. 문화예술을 존중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은 국내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서 미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왔다. 한 자동차 회사는 아티스트와 상업 디자이너의 이색적인 만남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자국의 유명한 예술작품을 상품에 입히고 광고에 등장시켜 기업 이미지를 고취시켰다. 이국의 문화는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명화는 전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라는 이유다.
아트 마케팅은 ‘이윤’보다는 ‘기여’에 초점 맞춰야
아트 마케팅은 올해도 기업들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상품판매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시장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술을 마케팅에 도입해 효과를 봤던 기업들은 올해도 ‘미술’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선보일 태세다.
한 건설업체는 청소년들의 미술관 관람료로 1억 원을 지원했다. 기업의 접대비 지출액 중 문화접대비 지출이 3%를 넘으면 접대비 한도액을 10%까지 추가 손비로 인정하는 ‘문화접대비 운동’ 때문이었지만 이 마케팅 전략은 앞으로 고객이 될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학부모들은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기부에 흡족해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도 미술품들이 등장했다. 모델하우스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전시회를 개최하고 대학의 졸업전시회를 유치해 학생들의 재정 부담을 줄였다. 주택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 건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10월 전국 미분양 아파트는 10만 가구에 육박한다.
소비자들의 욕구가 변한 것도 큰 이유다. ‘견고하고 튼튼한’ 아파트는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웰빙’ 붐으로 일격에 무너졌고, 2005년 이후에는 ‘릴랙스’ 바람을 타고 문화에 대한 욕구가 고착되기 시작하면서 건설사들은 아트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술 마케팅은 미술시장의 성장이 발단
거대한 자금이 미술시장에 유입됐다. 2007년 국내 미술경매시장의 규모는 1천2백억 원으로 2006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성장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갤러리에서 판매되는 미술품이나 작가와의 직거래를 감안한다면 그 시장 규모는 가늠하기 어렵다.
작품 가격도 급등했다. 금은보화가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니지만 신통한 돈벌이로는 그만이다. 예를 들면 故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2004년도까지 5억 원을 넘지 않았다. 2006년까지만 해도 최대 10억 원이었다. 하지만 2007년에는 작품 ‘빨래터’가 45억 원에 팔렸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수십억 원의 차익을 낸 것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거품’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국내 미술시장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미술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세금’이다. 미술품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매매 차익금이 발생해도 세금이 전혀 없다. 2003년 말에는 양도차액에 대한 과세법안도 완전 폐지됐다. 단 상속이나 증여의 경우에는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토지나 건물처럼 등기 등록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자도 정확하지 않고, 명의변경을 할 필요도 없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대기업들이 직접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명한 미술작품은 투자가치도 있고, 세금 혜택도 주어지며, 덤으로 고객들에게 문화 서비스를 제공해 기업 이미지도 제고할 수 있다. 삼성이 비자금으로 고가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설득력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의 출처를 밝힐 필요도, 거래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어서 암암리에 비자금을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며, 상속 증여도 자유롭다.
해외 유명 작가 컬렉션으로 유명한 한 갤러리의 관계자는 “콜렉터들은 가격이 쌀 때 작품을 대량 구매한 뒤 가격이 올라가면 하나씩 내다 파는 식으로 차익을 올리거나 유망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이고 값이 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방법으로 투자한다”면서 “수십억을 웃도는 유명한 작품들도 특별한 경로를 이용하면 누가 구입했는지 모르고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씨가 관장으로 있는 리움미술관의 소장 규모는 고미술, 현대미술을 통틀어 1만 5천여 점에 달한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도 60점이나 포함돼 있다. 이중 한국 근현대미술품이 3천여 점, 외국 미술품이 800여 점이 의혹의 대상이다. 이 작품들은 국내 유명 갤러리나 개인적인 경로, 해외 경매를 통해 삼성에 들어간 작품들이다.
2021년 4월 고 이건희 회장님의 유족은 총 2만 3,000여 점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12조 규모 상속세를 납부하는 동시에 의료 공헌과 미술품 기증 등의 사회환원을 실천하기로 했다. 이 글은 그 전에 썼다.
불법 미술품 거래 의혹 푸는 길은 과세뿐
리움 미술관에 가면 야외광장에 프랑스 출신 여류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과 ‘스파이더’가 전시돼 있다. 1999년 로댕갤러리가 개관하면서 설치한 프랑스 근대조각가 로댕의 청동조각 ‘지옥의 문’도 리움의 소장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리움은 로이 리히텐슈타인, 장 뒤뷔페, 마크 로스코, 프랭크 스텔라, 게르하르트 리히터,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칼 안드레, 앤디 워홀, 올덴버그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 쫙 벌이지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품들은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기업들에게도 역시 ‘삼성’이라는 부러움 내지 존경심을 은근히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계기로 미술계에서는 미술품을 거래할 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세법에서 미술품이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 미술시장이 훨씬 큰 외국에서도 10~20%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미술품에 대한 과세가 시장을 위축시킨다는 주장이 있지만 미술계 내에서도 과세에 대한 시각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금 혜택을 없애면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은 바로 잠잠해지겠지만 건전한 아트마켓은 형성될 수 있다.
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따라서 기업들도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술을 마케팅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본디 미술 시장은 재벌들이 주도했고, 그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문화였다. 하지만 미술품이 일반인들에게 투자 대상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폭넓은 애호가들을 생산했고,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갖도록 했으며, 이를 눈여겨본 기업들은 미술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전이 과정이다.
만약 미술이 돈이 되지 않았거나 우아한 삶에 대한 동경을 품게 만들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기업들의 다채로운 아트 마케팅이 한창인 지금, 미술은 진정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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