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곳은 거실과 연결된 격자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하얀 책상이다. 책상 앞에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어쩌면 유흥가와 직접 연결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창이 있고 그 창 아래로는 외풍을 막기 위해 좁게 문을 낸, 마치 사계절의 모습을 탐스럽게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창문이 있다. 이 창문은 겨울이 지나는 2월 가장 꽁꽁 얼어붙어 있고 초여름부터 9월까지는 항상 열려 있다.
도시의 풍객(風客)들이 보이는 아주 작은 방, 그곳에서 화초를 키우고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본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편안한 휴식과 안정을 선사하는 내 방에 늘 고마움을 느끼고, 다시 이곳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상상의 좌표를 설정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는다. 내가 사는 곳이 화려한 장식과 멋진 미술품으로 채워지거나 그와 비슷한 멋과 가치를 발산하는 곳이었다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소한 일상과 사랑이 스며든 소박한 공간이기에 언제나 나에게 평화가 됐고, 기쁨을 줬다. 그래 예술이란 이런 거 같다. 예술가는 행복하거나 특별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적어도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예술을 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사상과 감정을 풀어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라면 난 할 말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머릿속 사고와 가슴에 흐르는 사고의 작용 그리고 손재주로 만들어내는 관념의 산물이며 배타적 재산을 세상에 쏟아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다. 나는 예술가로서의 의혹과 절망에 대해 명백하게 인정한다. 조락한 순간의 영광과 기쁨, 비참한 감정과 슬픔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의 삶. 또 부자와 명예로운 이를 동경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싸워나가는 공허와 불안, 그런 무서운 방황들이 예술가의 운명이다. 한자리를 차지하고 정주하지 못하면 가난하고 배가 고프게 돼있다. 악성 베토벤도 빵의 결핍에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가 왕립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다면 분명 풍요로운 미래가 보장되었을 텐데, 그는 왜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사람들 대부분은 낙천적인 사고와 신앙에의 귀의로 삶을,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 자부심, 신령한 기운, 심원한 철학과 사상 등 모든 것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임에도 불구하지만 이를 삶의 모든 것인 양 포장하며 산다. 나는 싸운다. 나와, 또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풍요한 삶과, 예술가의 길에서 말이다. 예술가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란 누구인지 느낄 수 있는 책이 있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목수일을 하거나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나가고 있다. 이들은 화려하고 고고한 미술계와는 동떨어진 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그림을 또는 조각을 계속할 수 있다면'으로 귀결되고 있는 예술가로의 숙명을 민망할 정도로 순응하며 궁핍한 생활을 견디고 있다. 산다는 것이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저자인 박영택 경기대 교수의 말처럼 혹독한 가난과 궁핍을 자청하면서 몸을 공양하듯 미술 행위에 매달리는 예술가들을 보면서 안일하게 일상을 이어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반성의 거울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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