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하고 간결한 발묵이 살아 움직이는 듯 그림 속에서 꿈틀거린다. 털털하고 소박한 표정의 연제식 신부 마냥 고요하고 부드럽다.
도인 같았다. 연제식 신부에게서 풍기는 모든 이미지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긴 머리카락, 손질하지 않은 듯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시간의 풍파를 견뎌내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주름살, 탐하거나 성내지 않고 유유자적 자연을 벗 삼았던 청정한 기운. 삶의 질곡과 난항을 이겨내기 위해 수양을 거듭한 듯 그의 눈동자는 신중하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구역질 나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의 자혜로움을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에 젖어 있는 듯했다. 이미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닿아있는 사람 말이다.
생명평화마중물 후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 전시회에서 연제식 신부를 만났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소곳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연제식 신부. 마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그림을 사달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 민주, 통일을 위해 현장에서 뛰고 있는 문규현 신부를 돕고자 전시회를 열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냈던 벗의 소중한 발걸음에 조금이나마 여력을 보태려고요."
연제식 신부는 60여 년 동안 그렸다. 북한 동포 돕기, 자선바자회 등을 위해 개인전을 수십 회를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 가격은 똑같다. 한 장에 100만 원. 돈도 돈이지만, 서로 돕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얘기겠다.
"밥 먹기가 힘들 정도로 팔이 아파서 혼났어요. 원래 전시할 작품은 30점이었는데, 문규현 신부가 50점을 해달라고 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그렸는데도 45점밖에 못했어요. 좀 안타깝네요."
연제식 신부의 작품에는 공이 많이 들어간다. 1,000년이 넘게 간다는 닥종이에 색을 바꿔가면서 하나하나 점을 찍어 양감과 음영을 묘사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배치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 이 덩어리들은 조화롭게 어울리며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의 작품 주제는 산이다. 그는 자연에 묻혀 살고 있어서인지 "산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하는 진경산수화이다. 표현법은 독특하다. 실경을 그대로 묘사하지만 그만의 색채 언어로 새롭게 구성한다.
연제식 신부는 현재 충북 괴산 은티마을에서 산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는 목에 통증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 사목이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한국 가톨릭교회 사상 첫 귀농 신부가 됐다.
"농사도 짓고 그림도 그리고 피정 온 사람도 맞고 미사도 합니다. 젊었을 때는 잘난 체하느라고 말도 많았는데, 이제는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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