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지상은 민중의 차가운 분노와 따뜻한 사랑을 담은 노래로 고단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는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 노래패 '노래마을', '민족음악인 협회'를 거쳐 현재 솔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노래가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가조차도 효율성을 따지잖아요. '가슴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 혹은 '노래 한 자락이 내 인생을 바꿨다'라는 식으로 노래에 대해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아름답고 절절한 목소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왔던 민중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그의 4집 앨범이 발매될 때였다.
노래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그의 음성은 맑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에게 "목소리가 참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국내 최초의 중얼가요 1호 가수가 자신"이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내가 계속 "아니"라고 우기자 그는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면서 "선천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다"며 웃어버렸다.
그는 시노래운동 '나팔꽃'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팔꽃'은 좋은 시를 노래로 만들어서 널리 알려내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 1999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등 시인과 백창우, 김원중, 홍순관,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등 음악인이 모여 창단했다.
"요즘 노랫말들은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가사가 많아서 천박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언어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시'인데, 좋은 시가 많은데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죠. 그래서 시를 음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선입견이 지나쳤는지 모르겠지만, 가수 이지상의 삶은 '딱' 예술가답다. 그는 새벽 5시에 취침해서 오전 11시경에 일어나는 올빼미족. 스스로 올빼미족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듯 보인다.
그는 평소에 공연이 없거나 휴식이 필요하면 벽제에 있는 기독교생활공동체 '동강원'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 아니면 동네 뒷산에 올라간다. 하지만 개인 사무실이 생긴 뒤, 그는 이곳에 출근해 자리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주로 약속, 공연, 방송 등으로 하루를 채운다.
이지상은 성공회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로 강의를 맡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과목은 '노래로 보는 한국 사회'. 그는 학생들이 매기는 교수평가에서도 평균 이상의 높은 평점을 받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3시간 강의를 위해 6시간에서 8시간은 준비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아는 내용이라고 해서 쉽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수 이지상의 힘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진정성을 갖고 임한다는 것. 또 "갈망은 적당하게, 낙관은 지나치게"라는 그의 말처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살기에 늘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수 이지상은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의 창단 멤버다. 분신정국이었던 1991년, 대학 4학년이었던 그는 공연보다는 거리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그때 그 시절 잊을 수 없었던 추억 두 가지를 꺼냈다.
"91년 동대문에서 전경들과 쫓기고 쫓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에 함께 하다 길가 포장마차에서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는데, 김귀정 열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더군요. 버스 안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공연을 하기 위해서 'T3'이라는 건반악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어렵기도 했고, 돈을 대줄만한 사람들이 없었지요. 하는 수 없이 팀원들이 30만 원씩 210만 원을 모아 'T3' 건박악기를 샀습니다. 드디어 첫 공연이 있던 날, 국민대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가 건반을 택시 트렁크에 놓고 내려버렸습니다. 결국 기타로만 공연을 해야 했지요. 그 당시에 210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었는데, 아무 말도 안 나오더라고요."
이후 그는 성남지역을 연고지로 활동했던 '노래마을'에서 활동했다.
"다 찌그러진 승합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공연했던 그 시절이 생각나 돌아가고 싶은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추억이 남아있는 시간이지요."
그의 노래인생에 있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원동력은 '노래마을' 시절인 것 같았다. 한 달에 40~5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해냈다는 것. 각고한 노력과 열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화성 화가 - 귀환의 착각, 돌아오지 못한 평화 (0) | 2022.09.06 |
---|---|
조문기 화가 - 우울한 남성성의 자화상 (0) | 2022.09.05 |
홍령월 금강산가극단 단장 - 예술로 조국 통일에 기여한다 (0) | 2022.09.04 |
실버 라이닝 비폭력주의 랩 그룹 - 평화를 얘기할 뿐 (1) | 2022.09.04 |
유리화영 서울여성의전화 사무국장 - 영화로 가정폭력 문제 여론화시킨다 (0)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