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와 관현악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줄기 애달픈 목소리가 무대 위로 훨훨 날아올라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가득 채웠다. 반세기 동안 둘로 갈라져 살아왔던 우리 민족의 슬픔이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대리석 기둥을 따라 공연장에서 걸어 나오는 단아한 발걸음의 할머니. 금강산가극단의 홍령월 단장이었다. 나는 그와 손을 잡고 따뜻한 인사를 나누면서 한동안 그 손을 놓지 못했다.
홍령월 단장은 성악가이자 인민배우다. 북측에서 최고 명예로 꼽는 '김일성상'도 수상했다. 그는 재일 조선인이다. 일본에서 동포 2세로 태어나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재일조선중앙예술단에 입단했다.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은 '금강산가극단'의 전신이다.
"1974년이었어요. 김일성 주석 탄생 62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었지요. 그때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홍령원 단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노래 4곡을 불렀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만나게 되니 감정이 복받쳐 오르더군요. 그 이후부터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강하게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결심했죠."
북측은 1957년부터 재일 조선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가르치는데 열의를 다했으며, 재능 있는 동포들을 세계적인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김일성 주석 탄생 62주년 기념 공연에서 가슴이 복받쳐 올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시기에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은 금강산가극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금강산가극단은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 기념일을 맞아 이남에 방문하게 돼 정말 기쁩니다.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에 이번 남측 공연은 조국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입니다."
1955년 민족의 넋을 심어주고 조국의 통일, 일본인들과의 친선 유대를 위해 탄생한 금강산가극단의 단원들은 모두 조선인 3세와 4세들이다. 피눈물을 흘리며 현해탄을 건너가 온갖 천대와 박해 속에서 고생했던 자녀들이 만들어내는 공연인 셈이다. 홍 단장은 지난날의 아픔이 생각났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따라서 발끝부터 소름이 돋으면서 가슴이 메였다.
"부모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외세에 의해서 불안에 떨고, 옥신각신하며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외세의 간섭을 몰아내고 하루빨리 우리 민족끼리 단결해서 일어서야 합니다."
금강산가극단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음감을 최대한 살린다. 전통예술을 바탕에 둔 공연인만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다. 악기는 저대, 해금, 가야금, 장새납 같은 북측의 계량악기를 이용한다.
"금강산가극단의 진면목은 민족의 얼을 지키면서도 현대 예술로 손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금강산가극단은 '민족관현악단'답게 현대적인 음감을 살리면서도 민족적인 정서를 그대로 살리고 있습니다. 주체적인 민족의 감정을 최대한 살리면서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홍 단장은 내 손을 잡으면서 6.15 시대를 사는 남측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조국 통일을 이룹시다. 일본 우익들도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주체적으로 우리의 길을 가야 하며, 조국 통일을 위해서 우리 금강산가극단도 민족예술로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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