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최병수 현장미술가 - 한열이를 살려내라 주인공, 민중의 의식전환 필요하다

이동권 2022. 7. 30. 17:13

최병수 현장미술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하는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87년 6월 항쟁의 뜨거운 불씨를 지폈던 현장미술가 최병수. 2005년 1월 그는 위암 수술 후 요양을 위해 물 맑고 공기 좋은 가평군 금대리 비룡대마을에서 다시 전선에 나갈 날을 꼽으며 심신을 다지고 있었다.

최병수는 2004년 북한산 터널 건립반대,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미군 평택기지이전 반대 등을 외치며 들녘에 망루를 세우고 솟대와 장승을 꼽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주위를 안타깝게 한 바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통일이여 오라 '장산곶 매', 새만금 갯벌 살리기 장승벌 '하늘마음 자연마음', 미군의 폭격으로 숨진 어린 손자를 품은 할아버지를 묘사한 '너의 몸이 꽃이 되어', 두 눈을 가린 채 죽기만을 기다리는 고 김선일 군을 그린 '살고 싶다'가 있다.

최병수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주목받은 작가다.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지구를 일회용 밴드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쓰레기들', 2000년 현대판 노아의 방주, 'We are leaving you', 2002년 요하네스버그의 퍼포먼스, 지구 온난화에 의해 천천히 생명이 꺼지는 '얼음 펭귄'으로 해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2002년 요하네스버그의 '펭귄이 녹고 있다'는 예술의 힘을 느끼게 해 주었지. 당시 신문 1면을 가득 채운 얼음 펭귄이 '리우+10'의 타이틀이 되었지만, 그것만큼 함축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없었거든. 그때 느꼈어. 이미지 한 장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이제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주제로 남극이고 북극이고 가서 솟대도 꼽고 펭귄 작업도 할 생각이야. 문명의 상징인 나침반을 통해 환경파괴의 심각성도 알리고 싶고."

망치와 붓을 감아쥐고 일어서며

기차는 은갈색으로 물든 겨울 들녘을 가로질러 가평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역사를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옷깃을 세웠다. 황량한 광장을 타고 사납게 몰아치는 북풍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움츠린 탓일 테다.

문득, 살을 에는 동장군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세차게 달려온 '기차'라는 녀석이 대단해 보여 가슴이 뜨거워졌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사랑과 정의를 그려냈던 현장미술가 최병수의 이미지와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꿋꿋하게 해내는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큰 스승이 되고 귀감이 되는 법이다.

평화와 환경을 테마로 강렬한 작품을 선보였던 현장미술가 최병수를 만났다. 현재 요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검은콩 두유 한 상자를 사들고 찾아갔다. 그는 추운 날씨에 먼 곳까지 와주었다며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서둘러 방으로 인도하는 그에게 건강은 어떠냐고 묻자, "환자 같이 안 보이지"하며 웃어버렸다.

최병수는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두 달째 요양 중이었다. 뜸을 뜨고, 연근을 비롯한 약재를 넣고 다린 민간약으로 속을 다스렸으며, 작품 정리도 하면서 솟대도 깎고, 마음도 깎고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한 장의 스케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커다란 어미 연어의 몸에 수백 마리의 새끼 연어가 몸을 붙이고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림이었다. 빗살무늬로 갈라진 아가미와 단단하게 굳은 유선형의 겉껍질은 굵은 연필로 그려진 근육의 동세를 따라 생명의 소중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살아 움직였다.

연어. 그는 2001년 섬진강에 연어가 돌아왔다는 기사를 보고 매우 동요된 마음으로 연어 솟대를 스케치했지만, 여러 가지 작업 때문에 지금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오염되고 파괴되고 단절된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예술가적인 탐구임이 분명했다.

"연어라는 것은 지구 상의 적혈구와 같은 역할을 하지. 인을 비롯하여 바다의 모든 영양소를 품고 3, 4년 동안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개울로 거슬러 올라와 곰과 독수리의 먹이가 되고, 또 그것의 소산물이 식물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해. 올해는 판화 작업을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2004년 민족예술상 개인상 수상자로 현장미술가 최병수를 선정했다. 사회 모순에 대항하는 미술 활동으로 현장에 직접 파고들었다는 점, 문화예술 운동의 대중화에 선도적인 일을 해냈다는 점이 수상 이유다.

"많은 동지가 애쓰고 있는데, 이런 큰상을 받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어. 특히, 현장에서 멋지게 폼 잡고 있을 때 받은 게 아니라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받게 되어서 더욱 송구스럽고. 현장에서 열심히 투쟁했던 정신을 잃지 말고,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라는 격려라고 생각해. "

최병수는 수상소감을 밝히면서 최근 구상 중인 '문명의 외도'라는 작품설명을 덧붙였다.

"인간들은 암담하고 캄캄한 세상으로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가 있어. 나는 그런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정열을 태우는 것이겠고. 자연은 인간을 향해 경고하고 있어. 그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돼. 내 몸도 자연과 같았지. 암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여러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 몸을 돌보지 못했거든. 자연을 거스르면 인간이든 문명이든 모두 파괴된다는 것을 내 몸이 먼저 보여줬어. 지금은 깊이 반성하고 있지. 몸이 허락한다면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민중문예운동에 뛰어들다

최병수는 1986년 홍익대학교 미대생들의 '정릉벽화'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끌려가면서 본격적으로 투쟁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상하게도 그때 그 시절의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다리 짜주러 갔다가, 진달래가 만발한 그림을 보고 그랬지. 왜 개나리는 안 그리느냐고. 학생들이 웃으면서 붓을 주길래 그려봤는데, 성북경찰서 형사들한테 잡혀갔지. 형사들이 목수가 그림을 그리는 게 이상했는지, 조서에 화가로 써넣더군. 그래서 졸지에 화가가 됐지. 이 '상생도사건'이 계기가 되어 현장미술을 시작하게 된 셈이야. 특히,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그림이 큰 주춧돌 역할을 해주었고 지금까지 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어."

1987년 최병수는 신문에서 이한열의 죽음을 보고 충격에 빠진 나머지 판화를 새겨 작은 손수건에 찍고 집회에 나갔었다. 그런데 너도나도 이한열 판화를 찍어 달라고 해서, 그날 수천 장의 판화를 찍어 냈다고 한다. 또 10미터가 넘는 대형 걸개까지 그리게 된다.

80년대 민중미술이 낳은 최고의 대표작으로 뽑히는 작품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렇게 탄생하게 됐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최병수


최병수가 생각하는 거대한 공존은 자연과 인류의 소통에서 찾을 수 있다. 새만큼 간척사업반대나 북한산 터널 건립반대 등에서 보여주었던 환경문제와 차세대 전투기사업 반대나 미군기지 평택이전반대 등에서 보여주었던 평화문제에 대한 각각의 메시지들은 결국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전제 앞에 놓여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내가 환경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구온난화야. 물론 거기에는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 녹아있지. 그러나 작품을 꼭 민중의 입장에서 그려내고 싶지는 않아. 자연의 입장에 서서 인간들에게 호소하는 것도 있거든. 새만금 갯벌에 세운 솟대가 그런 개념이지."

최병수는 정신의 원류에 흐르는 작가관을 얘기하면서, 미국에 대한 불만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미국 시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해. 부시는 어차피 포기했거든. 부시를 재선 시키는 미국의 과반수 시민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교토의정서만 해도 그래. 지들 나라에 토네이도가 굵어지고 이산화탄소로 알래스카가 녹고 있는데, 그런 대통령을 다시 뽑아서 어쩌자는 건지. 지구를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과 일본의 처사도 정말 참을 수 없는 노릇이고."

진부한 게 답, 이제는 하나로 뭉쳐야

민중예술은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대중들은 선동적인 역할만을 강조해 왔던 민중미술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감성적으로도 어필하지도 못해 스스로의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것은 현장에서 일하는 많은 예술가들을 이 바닥에서 떠나게 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됐다.

"현장미술이라는 것은 광대와 비슷해. 그 역할은 아주 대중적이지. 대중예술이라고 해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오라 가라 하는 것은 대중예술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 아니지. 대중적이라는 것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몸이 아픈 곳을 정확하게 진단해서 그것에 맞는 예술을 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예술이야. 하지만 감성적인 접근도 꼭 필요해. 그것이 더욱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거든."

그는 현장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의 숫자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고, 이제는 몇 명 남지도 않았다며 현장, 생산, 후원(유통) 개념의 창작활동이 되지 않는 것에 몹시 안타까워했다.

"오래전에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임금투쟁 소식을 들었지. 폐가 녹아내리고 있는데, 임금투쟁이라니. 자기 몸이 썩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투쟁에 매달리는 것은 짜장면만 사주니까 짬뽕도 사달라는 운동과 같은 것이야. 아파서 누우면 가정도 박살 나.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진정으로 고민한다면 임금투쟁과 함께 폐수 버리고 불법으로 쓰레기 처리하는 회사에 대항할 줄도 알아야지. 언젠가는 환경의 역습이 찾아올 거야. 그때는 누구한테 호소할 거야.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전인적 사고를 가져야 해. 그래서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최병수는 폐수와 대기오염문제로 노동자와 환경단체가 함께 파업을 해봤으면 좋겠다며 크게 웃기도 했다. 내 몸도 지키고 다른 사람도 지켜가면서,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보자는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겠다.

"기본을 무시하면 안 돼. 여기 와서 들은 얘긴데, 청평호가 쓰레기장이래. 온갖 기업인들이,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지. 모든 운동가들이 서로 교류해서 함께 고민해왔다면 과연 이렇게 됐을까? 이라크에 가니까, 환경운동가가 반전운동도 하냐고 그러더군. 걸프전 때 석유 저장고를 폭파시켜 바다가 오염되고 많은 동물들이 기름에 쌓여 죽었어. 매일 타오르는 불기둥은 막대한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서 공기를 오염시켰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전운동을 안 할 수가 있어. 환경운동은 평화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지구가 하나이듯, 총체적으로 문제가 생겨.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빈부격차를 만들어 놓고 두 개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어. 서울역에 실직자들, 노숙자들은 어떻게 할 거야. 그 사람들에게 정책적으로 터전을 내줘야 해. WTO도 농촌을 죽이고 있고. 진부한 얘기지만, 농민들, 노동자들, 모든 민중세력들이 하나로 모아가야 해.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최병수는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문화인 천시 풍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노동자, 농민 운동도 다 힘들지만 문화운동에 투자를 게을리해서는 안 돼. 문화운동가들은 무당이야. 굿 할 때, 자꾸 공짜로 해달라면 굶어 죽어. 민주노총이든, 전농이든 투자부분이라고 생각해야 해. 대한민국의 노동자와 노동자를 그리는 화가의 숫자를 비교해 봐. 과연 얼마나 되나. 80년대의 민중미술가들은 기본적인 지원조차 해주지 않아서 모두 떠났어. 재료비도 비싸고... 공들여서 작업을 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떠난 거지. 화가들은 배부르면 그림 안 그린다고 해. 그 말의 근거가 어디서 나온 거야. 그림쟁이도 그림으로 노동해. 배부르면 안 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야. 예술인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든 얘기일 뿐이고. 예술가들이 창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고민하는지 잘 모르는 무지와 편견이 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모나리자 하나만 2년을 그렸어. 나는 화가인 동시에 예술을 싸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데, 예술가에 대한 기존의 뿌리 깊은 편견은 이 세계에서마저 더욱 힘들게 만들지. 노동자들도 예술가보다 더 게으른 사람 많고 밥그릇 계산하는 사람도 많아. 이런 사고 자체가 민중문화예술운동의 발전을 저해시킨 것이야. 현장미술, 게릴라 식의 문예운동이 힘들어지고 있어. 그 많은 활동가들이 개인화되고, 남들이 안 도와주니까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 있지만, 실제로 시민들이나 사회단체에서 그만큼 지원을 해주었는지 생각해봐야 해. 민중문예 세력들이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야. 내가 김선일 씨 투쟁하면서도 회의를 많이 느꼈어. 내가 일하는 것 보면 신기하다고 말들이 많아. 혹시 북에서 돈을 지원받는 간첩이 아니냐고. 그건 내가 지독했기 때문이고 작품활동을 위해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지.

늦은 시간에 서울에서 출발한 나머지, 저녁 7시를 향했다. 그는 편안하고 구수한 입담으로 저녁밥을 챙겨주겠다고 난리다. 나는 그에게 작품 'We are Leaving You'을 보면서 눈물이 쏟아질 듯한 감동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몸소 작품 포스터를 챙겨 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We are Leaving You ⓒ최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