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전희구 노원구청 생활복지국장 - 아버지 의문사 책으로 펴내다

이동권 2022. 7. 30. 16:17

전희구 노원구청 생활복지국장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은 선명하고 붉은 핏방울을 남긴다. 뜨거운 빛으로 반짝이는 이 선혈은 무소불위한 권력의 칼날에 맞선 한 시대의 진실과 양심이 되어 꽃을 피운다. 깊은 상처를 잠재우고 민중의 들꽃으로 피어나 아름답게 타오른다.

등을 떠미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제법 따사로운 겨울 햇볕을 껴안고 찾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의문의 기록을 책으로 엮어낸 전희구 국장의 마음도 이러할 터.

정년을 앞둔 전희구 노원구청 생활복지국장은 마음속에 간직했던 질곡의 가족사를 한 권의 책 피어오를 새날에 옮겼다. 이 책은 한국전쟁시 문화공작단 사건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를 37년 동안 추적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2005년 1월 전희구 국장을 만났다.)

단아한 몸가짐, 온화한 미소, 신중한 말솜씨. 그러나 전희구 국장의 눈빛엔 아버지에 대한 사모와 그리움이 넘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현재 고인이 된 사람들을 향한 예의"라면서 "그들의 실명만은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국장의 한마디 한마디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인생의 깊이가 묻어난다.

전희구 국장은 "의문사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죽기 전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 죽은 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로 말문을 텄다.

"의문사가 한 가족과 사회의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진상 규명만이 개인과 역사 속에 사무친 분노와 원한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한 사람들에게 막연한 증오심을 가졌지만, 잘못된 진실을 사실로 믿고 괜한 오해를 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가는데, 그 앞에서는 완전범죄가 없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해 고백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와 선을 끝내 이루고야 마는 역사의 신 앞에서 더 이상 후손들에게 자신의 죄를 물려주지 않아야 합니다. 의문사와 관계된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진실을 꼭 밝혀야 합니다."

아버지 전상서, 그 억울한 죽음의 실체

전희구 국장은 지난 1997년 8월 한 언론인으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부산일보>에서 재직했던 그분은 유치환 시인이 부산에 내려오기 전까지 가장 저명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부산 <자유민보사>의 군 출입기자 K와 국군 하사관의 심한 말다툼으로 시작됩니다. 그 당시 K에게 모욕을 느낀 하사관은 그를 뒷조사해서 감옥에 보낼 궁리를 하게 되지요. 결국, 하사관은 그가 보도연맹에 등록되었던 과거를 캐내고, 군에게는 수사권이 없었으므로, 경남도경에 이를 고발합니다."

1950년 8월은 영천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어지고 있어, 머지않아 인민군에게 부산이 함락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빨갱이라는 제보만 들어와도 즉결 처형되던 시대였다.

"잠복근무하던 도경은 <자유민보사>에 출근하는 K를 잡으려 했지만, 놓칩니다. K가 도망갔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더욱 의심을 받게 된 K는 도경에 의해 긴급 체포됩니다. 그리고 도경은 K를 취조합니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부산 구덕 공설운동장 야산에서 얼굴만 내놓고 K의 몸을 땅에 묻은 후, 권총을 머리에 대고 위협을 가합니다. 목숨의 위험을 느낀 K는 <자유민보사>에서 근무하던 동료 4명의 이름을 댑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시인으로 잘 알려진 <부산일보>의 제2문화부장 이름도 댑니다. 도경이 이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제2문화부장 L과 술을 마시고 있던 S 편집부장과 아버지, 전임수(당시 29세)를 함께 연행합니다."

체포된 날짜를 살펴보면, <자유민보사> 기자 K는 8월 12일, 동료 기자 4인은 8월 14일, <부산일보> 기자 3인은 8월 15일이다. 전 국장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때는 9월 9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97년 진상규명이 된 후에는 연행 당일인 8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또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다하지 못했던 전국장의 한이 느껴진다.

"아버지는 경남도경 지하실로 끌려가 수사를 받았습니다. 말이 수사지, 무조건 패고 보는 것이었지요. 기자들은 신고자조차 모르는 거짓 혐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즉결처분이 행해졌던 시기였기에, 혐의를 인정하면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전희구 국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신 후,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주었던 <부산일보> 제2 문화부장 L의 이야기를 빌어 그 당시의 감옥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몽둥이는 견디겠는데,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붓는 고문은 인간 한계 밖이었다고 합니다. 죄명은 문화공작대이었고요. 북한이 부산을 점령하게 되면 좌파문화인들이 북한을 환영할 것이라고 덮어 씌운 거죠."

1950년, 보도연맹과 관련해 사망자는 현재도 추정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연루된 사람들은 즉결심판으로 사형을 당했으며 한국전쟁 최초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만들기도 했고 좌익세력 보복살인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6명은 죽음의 고문을 이기고 깨어났지만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육군 중령은 계엄군제에서 6명에게 사형을 선도했지요. 그 무렵 <뉴욕타임스>에서 '한국군은 전쟁과 학살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규탄하자 이승만은 불법구금과 법적 재판 과정에 대한 특명을 통해 군제의 사형 선도를 없앱니다."

"6명은 민간인 K검사에 이관되어 수사를 받습니다. 죄가 없음에도 고문이 일어났으며, 또 전임수(당시 29세)는 그렇게 죽었다고 항의했습니다. 검사는 그것은 고문이 아니라 엄문(엄한문책)이였다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연행 당시 아버지의 절명은 그렇게 은폐되고 검찰로 송환하여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역사는 아직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죄로 선도받은 사람을 6명으로 기록합니다."

전 국장은 1968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과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물었으나,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모두 은폐하고 함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함께 연행되었고 죽을 당시에도 함께 있었으며 경상남도 도청 뒷산에 아버지의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기도 했지만...."

"더욱 의심스러웠던 것은 68년 당시 문화부장 L은 자신의 인생에는 세 가지 숙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임 구의 죽음이라면서,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니 기다려라 했고, 편집국장 S는 공화당 경상남도당 선전부장을 하고 있어선지 말도 꺼내게 못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피어오를 새날 그날의 예감은 죽음의 빛으로 드리우다

나는 전희구 국장에게 책 제목 피어오를 새날에 대한 사연을 물었다. 전국장은 서류철을 뒤지다가 하얀 종이에 인쇄된 시를 내민다. 시의 제목은 '피어오를 새날'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진 시에서 책의 제목을 따왔다"면서 "이 책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쓰게 되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전 국장은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 같다"며 "그날의 상황과 시가 매우 잘 맞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 구절을 큰 목소리로 낭독해 주었다.


피어오를 새날
                                                글 : 전훈 (전임수의 필명)

마구 쏟아지는 소나기에
모가지 하나
피할 곳이 없구나.

곡예의 능한 쌀값마저
식어 가는 체온을 조롱하는가.

영화의 치욕의 못(針)에 매달린
수많은 모가지야!

눈물도 웃음도
이제 비타민인 양
삼켜야 하나니

언제면 활짝 밤이 지고
모란꽃 모양
피어오를 새날이여!

그때 저마다
먹빛 가슴속에
일곱 색 무지개 서리다.
그립던 것 껴안고
통곡하리라.

'피어오를 새날'은 고 전수임 선생이 도청 뒷산에서 행방불명되기 1년 전에 쓴 시로 집에 스크랩이 되어 전해 옴. 고 전수임 선생이 <대중일>보 재직 시절에 쓴 시로 판단된다고 함.

전희구 국장은 뼈아픈 가족사가 있다. 1954년과 1956년 두 동생은 각각 7살의 나이로 병사했고 1960년에는 어머니와 생이별해야 했다. 그는 피어오를 새날 에필로그에 1950년 어린 나의 기억에 남은 이야기, 빨치산, 밀고 (좌우의 대립), 보릿고개 등에 대해서 적어놓았다며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내가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가슴 아프게 왜 쓰셨느냐고 묻자, 전 국장은 "한집안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뺄 건 빼고, 보탤 건 보태는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의문사 진실규명을 외치면서 가족사를 감추는 것은 의미 없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한 사람의 의문사가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나쁜 영향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리고도 싶었다"며 가족사 기록의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