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목련이 작은 속살을 내보였다. 따뜻한 순풍이 늘어지게 겨울잠을 즐기는 꽃봉오리를 깨우며 봄을 알렸다. 그렇다면,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의 순풍이고 희망이며, 인간에게 다사로운 꽃향기를 물어다 주는 것은 인간의 신념과 의지다.
남북교류가 한창이던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교환학생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재일조선인 최성기 씨를 만났다. 최 씨의 국적은 조선적이다. 조선적은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남북이 갈라지기 전 조국, 조선이 바로 이들의 나라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 민족의 일원이긴 하지만 법적으로는 무국적자다. 조선적 학생이 어학연수로 한국에 왔던 경우는 있었지만 교환학생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일된 조국에서 저의 정체성을 찾고 있기 때문에 조선 국적을 버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재일조선인을 총련 활동가로 취급해서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해 안타까워요. 방법이 있어도 찾기 힘들고, 찾았다고 해도 매우 어렵지요. 어머니께서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한국을 방문했는데도 입국을 거부당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요."
최 씨는 한국의 태도에 불만인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선적으로서 자유롭게 고국을 방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며 인권이다. 조선적을 고집하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조선적 재일조선인이 소지하고 있는 외국인등록증에는 '조선'이라는 단어가 표기돼 있다. 조선적은 국적이 아닌, 조선반도 출신자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본인과 구분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놓은 '구분 기호'다. 현재 조선적의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한국, 북한,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민족이라는 자각에서다. 그래서 남과 북을 모두 자신의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도 통일조국을 기다리는 마음이 강하다.
최성기 씨는 일본에서 고급학교(고등학교)까지 가나가와 조선학교에 다녔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한양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가 한국에서 사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같은 민족인데 한국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줘서요. 친구들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지 않으냐고 하는데, 저는 한국에 친구들이 있어 외롭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근데 일본에서 전공수업을 들을 때는 일본어였지만 한국에서는 영어로 수업해서 고생 좀 했지요."
최 씨는 내 나라인데, 남이든 북이든 살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일 조국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말이다. 또 일본에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재일조선인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며 조선인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에 오기 힘들었어요. 공부 외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지요. 저의 한국행을 위해 많은 사람이 고생했어요. 특히, 민단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그는 고급학교 시절 만경봉호를 타고 북에 가봤다고 했다. 백두산, 판문점, 평양, 원산 등에 들렸고 영화배우나 군인들에게 강의도 들었다고 한다.
"북에 갈 때, 고향에 간다는 느낌이었어요. 북은 조선학교나 동포사회에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거든요. 같은 한민족이라는 유대감이 강했어요. 하지만, 제 할아버지의 고향이 경주인데도 한국은 재일조선인을 지원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일본인이 되라는 식이었죠. 일본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조선적을 만들었는데, 정작 한국은 똑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간첩 정도로 생각하니. 참."
최성기 씨는 일본의 극우적인 행동,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으로 첨예한 대립을 빚어온 양국의 입장에 어떤 시각을 갖고 있을까?
"어머니가 그랬어요. '모르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요. 재일동포 중에 이 문제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줘야 하죠. 만주대학살에 대해서도 우익들은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조선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다 알고 있죠. 재일조선인이라고 해도 일본학교에 다니면 몰라요. 일본에서는 신사를 찾는 사람을 나쁘다고 말하기는 곤란해요. 신사참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거든요. 하나는 전쟁을 옹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이들 중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이 많고, 안 가고 싶어도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나 저는 신사참배에 반대해요. 한마디로 열받죠. 수박밭에서는 신발끈을 고치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리 좋은 뜻이 있더라도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돼요. 식민지 시절, 100명이 넘는 사람을 구덩이에 넣고 불태웠던 일도 있어요. 신사참배는 말도 안 돼요."
최 씨는 처음에는 일본인처럼 생활하다 갑자기 조선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일본 학교에서는 한국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어 독학으로 공부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또 점점 조선학교에 오는 사람이 적다고 토로했다. 입시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래서 그는 조선학교의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바꿔서 많은 재일조선인이 조선학교에 찾아오도록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국전쟁을, 남에서는 북침이라고, 북에서는 남침이라고 해요.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녜요. 무력으로는 통일도, 미래도 없음을 알려주는 교훈이 더욱 중요해요.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고 역사를 가르쳐야 해요."
재일동포 1세의 생활은 비참했다. 탄압과 차별로 피를 토했고, 전쟁에 끌려가서 죽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학교를 세웠다.
동포 2세대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자위대와 싸워서 다치고 잡혀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조선학교를 지켜냈다.
동포 3세대인 최성기 씨는 조상이 만들고 지켜낸 조선학교를 키워야 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민족을 지키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면 역사를 같이했던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보다 북측 사람이나 조총련을 먼저 떠올리는데, 저는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민족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특허를 내거나 사업을 해서 재일조선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 노력할 거고요. 민족의 발전을 위해,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지켜낸 조선학교를 키우고 싶어요. 국기도 통일기를 게양할 거예요. 1학년에는 북에서, 2학년에는 남에서,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면서 가르치고 싶고요. 조국에 돌아가는 교육이 아니라 일본에서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요. 재일조선인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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