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54. 5월 투쟁 이후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동권 2021. 11. 22. 14:01

5월 투쟁 이후 명지대에서 열린 집회

 

5월 투쟁 이후 소수야당은 1991년 6월 20일 광역의회선거에서 패배했다. 


민자당은 41% 득표에 566명을 당선시켜 65%의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재야인사를 영입한 평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은 22% 득표에 165명이, 3당합당을 거부한 민주당은 14% 득표에 21명만 당선됐다. 


이후 신민주연합과 민주당은 통합을 선언했고, 호남을 근거에 둔 평민당과 3당합당을 거부한 영남 민주계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재야가 결합한 ‘민주당’이 출범하게 됐다.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후반기 정국 운영과 권력 재창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반대로 김영삼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는 일조해, 민자당 내부에서의 대권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1991년 12월 1일 단일 전선체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을 발족했다. 국민연합, 전민련, 비상시국회의 등으로 분산돼 있는 전선 운동에 대한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전국연합은 자주통일투쟁과 민권민생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남북과 해외동포가 참가하는 공동행사를 비롯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체결운동, 주한미군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운동 등 다양한 자주통일운동을 전개했으며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과 연대해 각종 정치투쟁과 생존권 투쟁을 전개했다. 


1992년 총선에서는 전국연합 자체후보와 범민주진영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연합공천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했고, 총선에 미친 영향도 미미했다. 


또한 대선에서도 민자당의 장기집권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시도하면서 범민주후보단일화를 꾀했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학생운동은 5월 투쟁 과정에서 노태우 정권과 보수언론의 여론조작으로 반도덕, 반인륜의 상징으로 고착화돼 힘이 점차 약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 정권은 전대협 간부를 구속하고 전대협 산하의 조국통일위원회, 정책위원회, 중앙위원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간부 81명을 지명 수배하면서 학생운동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 이에 전대협은 통일운동을 강화하면서 NL과 PD계열로 나뉜 정파를 쇄신해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을 모색했다. 


전대협은 1993년 3월 대의원 총회에서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 한 뒤 ‘민족의 운영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 대오’를 내걸고 ‘한총련’을 발족했다. 


청년운동은 1992년 8월 15일 제3차 범민족대회에서 범청학련을 설립했다. 범청학련은 민족연방제로 남북통일, 주한미군과 핵무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북한과 미국 간의 평화협정 체결 등을 기조로 활동했으며, 1998년 통일축전에 한총련 대표의 방북을 주도하다가 해산됐다.


노동운동은 1992년 전노협,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전국노련)을 중심으로 ‘ILO기본조약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노동절 기념 총액임금제 저지 결의 대회’에 이어 ‘전국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이후 민주노조 진영이 결집한 ‘전국노조대표자회의’가 발족됐고, 1995년 ‘민주노총’ 창립으로 이어졌다.


농민운동은 전농, 카톨릭농민회, 전농협 등 농민단체들이 전국적으로 쌀시장 개방반대 시위를 전개했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쌀 전량수매 학교급식 완전실현 92 전국여성농민대회’를 개최했으며, 1993년에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거부 및 쌀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 농민대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