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야. 지금도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우리 착한 경대가 지금이라도 “누나! 누나!”하며 나를 부를 것 같은데…….
누나는 항상 믿고 있다. 경대는 나의 가슴에,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만 헤어져 있다고 믿자. 우리 착한 경대 이제 아프지 않지? 편안히 잠자고 있는 너의 모습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지만 백골단 형들을 용서해주라는 듯 전혀 아픈 기색 없는 너의 예쁜 얼굴에 누나는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하늘나라에 가면 백골단이 때리지 못하게 경대랑 나랑 꼭 손 붙잡고 다니자. 영균이 형이랑, 세용이 형이랑 하늘나라에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테지. 형들은 경대가 보고 싶어. 경대를 위해, 경대가 외로울까 봐 가셨을 거야. 하늘나라에도 탁구가 있다면 형들이랑 탁구도 치면서 네가 좋아했던 과자도 많이 먹고 재미있게 지냈으면 좋겠다.
어머니, 아버지, 내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말고, 경대가 큰 힘을 주고 있으니까. 그럼 또 편지할게. 경대야. 꿈속에 꼭 답장해줘야 한다.
1991년 5월 7일
경대야! 오늘은 어버이 날이다. 예전 같으면 너랑 나랑 카네이션 사러 시장에 돌아다니며, 어머니 아버지 주무시는 머리맡에 카네이션 두 송이 놓아두고 행여나 깨실까 조마조마했겠지. 하지만 오늘은 네가 아버지 어머니께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대신 네가 전에 못 입어본, 대학교에 들어가면 꼭 멋지게 한번 입어보고 싶다던 양복을 어머니 아버지께, 너에게 입히는 날이다. 네가 있었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랑 같이 옷을 고르며 다녔을 텐데 오늘은 이 누나랑 네가 ‘애기 누나’라고 부르던 친구와 네 옷을 고르고 다녔단다. 그 추운 곳에 옷도 입지 않고 열흘이 넘게 지냈으니 네 몸이 꽁꽁 얼었겠구나. 경대야! 양복 입은 네 모습이 정말 의젓하고 멋있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도 “우리 경대 의젓하네.”하시며 대견해하셨단다. 네가 잠깐 동안만이라도 일어나 눈을 뜨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경대야!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너를 지켜주는 사수대 동지, 경제학과 학우들 그리고 열심히 투쟁하는 전대협 백만학도, 애국시민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1991년 5월 8일
분노가 넘쳐 나는 울 수도 없다. 경대야!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어딘가에 내 얼굴이라도 보고 있니? 경대야! 지금 나는 너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너를 자세히 생각할 수도 없구나. 너무 가슴이 아파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네가 옆에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경대야 무척 보고 싶다. 요즘에 와 네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는데 이젠 너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니. ……. 우리 경대 얼마나 아팠니.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지? 약도 못 발라 줬는데 상처가 아물었는지 모르겠구나. 밥도 무척 잘 먹고 과일도 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경대야.
광주 망월동에 누워 있는 건 네가 아니야. 사랑하는 내 동생이 아니야. 항상 귀찮게 물어보고 튼튼하던 경대가 아니야.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고 노동자와 자본가, 미제를 역설하던 경대가 아니야. ‘경제학을 공부하면 잘 살고 착취하는 자본가의 입장에 쓴 학과책보다 억압받고, 일한 만큼 제 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입장에 민중을 대변할 수 있는 책이 올바르다’며 너의 친구에게 열을 내며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내 동생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단다. 너의 변화를 보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단다.
광주는 참으로 따뜻한 곳이다. 시민들도 진정 슬픔을 같이 해주시고 눈에 눈물이 고이신다. 얼굴은 모두 선하고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순수를 느낀다. 동질감을 느낀다.
“저렇게 예쁜 애를 누가 죽였어? 코도 잘생기고 입도 잘생겼네. 노태우 새끼가 아까운 자식들 다 죽이네. 다 죽여. 미쳐 죽것네. 미쳐 죽것어.”
하나같이 눈에는 이슬이 고이신다.
1991년 8월 16일
경대야. 너와 이렇게 얘기를 나눠 본 게 언제인지……. 너무 미안하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누나가 왜 경대와 시간을 못 가졌는지 얘기해 줄게.
기쁜 소식 하나 있어. 조카들이 태어났단다. 다원이, 조원이야. 너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구나.
만약 네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보살펴 주고 신기해하며 든든한 삼촌, 살뜰한 고모가 되어 있겠지. 너의 성격이라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따뜻하고, 재미있는 삼촌이 됐을 거야.
다원이는 감기도 많이 걸리지 않아서 수월하게 컸단다. 그런데 조원이는 이번 겨울에 많이 아팠어.
자식이 아프니까, 정말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게 죄인처럼 느껴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구.
부모님의 마음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부모님의 마음을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나 고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송구스럽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2011년 4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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