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50. 분신정국

이동권 2021. 11. 22. 13:50

열사 상징의식

 

5월 투쟁은 첫 시작부터 6월 항쟁과 비교됐다. 87년 민주세력은 집권에 실패했지만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면서 정권 재창출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민주세력은 노태우 정권에 맞선 민주화를 진척시키기 위한 방법은 제2의 6월 항쟁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강경대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동일시 됐다. 국가의 폭력이 구조화된 이 땅에서 ‘열사’는 직접적으로 대중투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강경대의 죽음 이후 계속된 분신은 노태우 정권의 숨통을 조이는 화약고 역할을 했다.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승희는 경대가 죽고 난 뒤 전남대에서 열린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고 외치며 분신했다. 승희는 고교시절부터 전교조 선생님을 지지하며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떴다. 


5월 1일에는 안동대 김영균이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영균은 고등학교 때부터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며 교육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3일에는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세용은 경대가 죽고 두 학생이 분신한 가운데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젖어 집회에 참여하는 수가 줄어들자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6m 아래로 뛰어내렸다.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분신했다. 기설은 원진레이온 사태를 사회 쟁점화 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이는 노태우 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10일에는 광주에서 윤용하가 분신했다. 용하는 89년 초 대학출신 현장 활동가를 만나면서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 고민하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한 점 불꽃으로 산화했다.


18일에는 서울에서 이정순이 분신했다. 정순은 예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 경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 앞 철교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투신했다.


같은 날 전남 보성고 김철수와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이 분신했다. 철수는 교내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다 5·18 기념행사 도중 분신했다. 태권은 버스운전을 하는 운전기사로 분신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동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22일에는 광주에서 정상순이 분신했다. 상순은 계속되는 분신에 괴로워하던 중 고향 후배인 김철수가 분신하자 전남대 병원에서 투쟁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6월 들어서는 8일 인천 삼미기공 이진희가 분신했다. 삼미기공 노동조합 홍보부장이었던 진희는 임금인상 보고대회 도중 노동조합 측의 타결안을 듣고 분노해 분신했다.


15일에는 인천 공성교통 택시노동자 석광주가 분신했다. 광주는 사업주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임금협상 태도에 분노해 온몸으로 항거했다.


5월 투쟁 과정에서 분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월 6일에는 한진중공업 박창수가 의문사를 당했다. 창수는 제삼자 개입금지위반으로 구속됐다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창수의 죽음은 안기부 차원의 노조 탈퇴 및 와해 활동이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권의 비협조와 은폐로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되지 못했다.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도중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질식사했다.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리는 날, 경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공격했다. 이날 10분 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의 양은 다연발 1백 60발, 사과탄 1백 14발, KP탄 6백 72발 등 모두 9백 46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