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49. 5월 투쟁의 기폭제, 강경대

이동권 2021. 11. 22. 13:47

故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

 

강경대가 죽기 전까지 정국 운영의 향배를 결정할 최대 분수령은 1991년 5월 24일 ‘광역의회선거’였다.


노태우 정권과 자본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눈에 가장 거스르는 세력으로 노동자들을 지목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정권에 유리한 정서의 흐름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혹독한 폭력과 탄압을 가하면서 공장의 열기가 거리 정치투쟁으로 분출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동시에 노 정권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국민의 이목을 선거에 집중시켰다. 국민에게는 6·29선언의 의미를 포장하면서 여당의 이미지를 부각했고, 경제난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렸다. 그리고 임시국회에서는 야당과 국가보안법 문제를 타협적으로 풀어가는 척하며 광역선거에서의 승리를 준비했다. 


민족민중 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직 활동이 선거에 집중돼 대중투쟁에 결합시키는 논의는 겉으로만 맴돌았다. 


이러한 시기에 강경대 타살 사건은 일거에 정세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백주에 고귀한 생명을 때려죽이는 정권에 대한 분노는 크고 작은 시위로 번졌고, 전 국민적인 투쟁으로 확산됐다. 이른바 ‘5월 투쟁’이다. 


5월 투쟁은 강경대 사건이 발생한 4월 26일부터 민주세력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했던 6월 29일까지 전개됐다. 이 기간 동안 생존권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대중 투쟁이 거세지면서 노태우 정권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한 11명의 학생, 노동자, 빈민이 분신했고,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 도중 질식사했으며,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했다. 


다급해진 노태우 정권은 갖가지 민심수습대책을 내놓고 내각제 개헌을 포기했다. 반면 강기훈 유서대필사건과 정원식 밀가루사건을 이용해 5월 투쟁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지도부의 근거지였던 명동성당에 대한 경찰투입설을 흘렸다. 


결국 6월 24일 유서대필사건의 희생양인 강기훈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진출두하고, 29일 마지막 남은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철수하면서 60여 일간의 5월 투쟁은 끝을 맺었다.


5월 투쟁은 전개된 양상에 따라 세 시기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투쟁이 거세지는 시기다. 강경대 사건 이후 곧바로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내무부장관 경질이라는 노태우 정권의 조기 진화에 맞서 전국적으로 20여만 명이 참가한 5·4 살인규탄집회가 열렸다. 이 시기에 운동진영은 투쟁의 수위를 조절했다. 비폭력으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야당을 비롯해 다양한 투쟁주체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투쟁의 중심은 학생들이었으며 대중운동과의 결합은 연대 수준에 그치는 정도였다.


두 번째는 5월 5일부터 20일까지 대규모 대중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시기다. 이때는 학생, 노동자 등이 투쟁을 이끌었고 전교조, 전농, 전빈련 등이 힘을 더해 대대적인 투쟁이 조직화됐으며,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등 수위도 높았다. 노 정권은 이러한 수세적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해 노재봉 내각을 부분 개편하고, 3당합당을 통해 야당의 분열을 촉발시켰으며, 운동진영과 대중의 결합을 막기 위해 다양한 언론공작과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다.


세 번째는 5월 20일 이후 대책회의가 상설 연대기구로 재편되면서 조직의 수준을 높이고 대중투쟁 성과의 극대화를 꾀한 시기다. 하지만 전술이나 조직운영, 목표가 두 번째 시기와 다를 바 없어 시위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노태우 정권은 이 시점에 대책회의를 공개수사하고 강기훈유서대필사건을 날조하면서 국민들을 5월 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제3차 범국민대회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김귀정이 질식사하는 사건이 터졌지만 정원식 사건을 빌미로 여론 공세를 펼쳐 5월 투쟁은 급격하게 퇴조했다. 결국 6월 광역의회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하면서 5월 투쟁은 종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