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전투경찰)은 노태우 정권의 두 얼굴이었다. 이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권위주의 체제를 청산하겠다고 다짐했던 노태우 정권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기만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경의 첫 양심선언은 1987년 7월 양승균에게서 나왔다. 뒤를 이어 수많은 전경들이 양심선언에 동참했으며, 강경대가 죽은 199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경들은 수배와 구속이 되는 것은 물론 미래의 삶에 장애가 될 만한 일이었지만 방독면 속에서 흘려야 했던 눈물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양심선언을 선택했다. 이들이 양심선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경들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참기 힘들었다. 생존권을 외치는 시각장애인을 구타하고, 노점상의 손수레를 뒤엎고, 친구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선후배들과 적이 돼 만나고, 폭행 당해 신음하는 학생들을 보고, 비폭력적인 시위대마저 마구잡이로 연행하고,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욕을 듣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더 이상 전경을 계속할 수 없었다. 특히 일가친척과 마주 서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농민집회에 참가한 아버지를 막고, ‘삼구29)’로 잡아들인 형제의 얼굴을 지켜보는 일은 죄스러움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같았다.
폭압적인 분위기와 터무니없는 교육도 양심선언의 배경이 됐다.
전경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조총련의 사주를 받는 좌익폭력세력’이라고 교육받았다. 또 시위 진압을 잘 못하면 ‘개새끼들 그걸 못 잡아.’, ‘들어가서 두고 보자.’는 등의 폭언에 짓눌렸으며, 지하실이나 옥상, 닭장차에 집합당해 경찰봉과 헬멧으로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맞다가 실신하는 경우도 있었고, 상관의 폭행을 피해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전경들은 무리한 진압에 동원돼도, 진압과정 중에 부상을 입어도 시위대를 향해 과도한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시위 진압에 대한 안전교육도 형식적이었다. 예를 들면 시위대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물을 허리에 걸고 잡아야 투신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안 걸어도 된다.’고 가르쳤고, 시위대를 향해 돌을 던질 때는 ‘사진에 찍히지 않게 위로 던지지 말고 아래로 던져라.’라고 지시했다. 때문에 전경들은 강경대 사건으로 구속된 동료들을 보면서도 대부분 무감각했고, 그저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은 전경 생활을 오래 한 선임일수록 심했다.
양심선언을 한 전경들은 5월 4일 ‘백골단·전경 해체의 날’을 맞아 다른 전경들에게 요청했다.
“직격탄 발사, 쇠파이프 사용 등 공격형 시위진압명령을 집단 거부하고, 시위대를 체포하지 않으며, 노동자·학생·시민들을 구타하지 말고, 부대 내에서 하급자들에 대한 구타 및 가혹행위를 하지 마라.”
29) 삼구는 경찰이 연행할 때 쓰는 언어로, ‘전원삼구’는 전원연행, ‘유인물삼구’는 소지품에서 유인물이나 사회과학서적이 있으면 연행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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