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24. 다시 바다에서 - 여행의 즐거움

이동권 2024. 3. 12. 16:00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배는 연평도를 향해 달렸다. 습하고 더운 열기가 몰아쳤다. 태풍의 전조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이런 날에는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따라 걷는 맛이 제법이었다. 담청색으로 물든 하늘과 청록의 향연으로 넘실대는 숲이 배경이면 더 좋았다. 그런 곳에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무더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더운 날에는 바다도 좋지만 산행도 괜찮았다. 산은 신록이 돋아나는 봄이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 백설로 뒤덮이는 겨울에도 좋지만 자연이 성장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여름에도 만족스럽다. 천지를 환하게 밝히는 야생화, 무지개 빛을 뿜어내는 폭포,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는 청량한 바람, 타들어 가는 갈증을 해갈해 주는 차가운 약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1)    


산은 계절마다 색다른 감동을 연출했다. 봄은 헐벗은 녹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겨울 내내 얼어붙은 눈과 얼음을 녹여 풍만한 계곡의 물소리를 만들었고 젊은 여인의 입술처럼 청조하기 이를 때 없는 개나리, 진달래와 연둣빛 잎사귀들을 깨웠다. 여름에 이르러서는 톱니바퀴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과 능선 사이사이를 초록의 절정으로 뒤덮었고,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는 고개를 넘어가는 산길과 골짜기 여기저기를 윤택하고 풍성한 단풍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면 마치 순환의 위대함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폭포와 능선, 계곡을 원시의 설경으로 연출하며 깊게 잠재웠다. 


나는 사계절의 산을 두루 다니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절절하게 느꼈다. 세월은 제 멋대로 쉬지 않고 가버렸다.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해파리처럼 흘러간지도 모르게 주름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초로인생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성숙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긴 여로의 대명사는 곧잘 나이 듦으로 표현되지만 헤쳐 나갈 미래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 같아 입맛도 써졌다.2) 


산사에서 갖는 휴식은 나에게는 큰 안식을 줬다. 절에서 만나는 각종 탑과 원형 부도는 항상 인상적이었다. 눈보라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긴 세월을 진드근히 견뎌 온 모습은 악의와 멸시를 이겨 내며 새 시대를 열어 간 사람과 비슷했다. 얼마나 외롭고 욕스러운 세월이었을까. 누군가 켜 놓은 공양초를 바라보면 눈언저리도 시큰해졌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가끔씩 공양초를 사서 세워 놓곤 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어지럽고 망령된 생각을 다스려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싯다르타는 이런 얘기를 했었다.

 

"번뇌는 두텁기만 하고, 익힌 버릇은 무겁고, 마음의 본성을 밝게 하는 관행은 약하고, 마음은 들뜨고 어리석어 무명의 힘은 세고, 지혜의 힘은 약해 선과 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동요한다."

 


1) 나는 산에 가면 꼭 술을 마셨다. 산을 보고 흙을 밟았으니 정상에 꼭 갈 필요는 없었다. 이제 나는 술 마시러 간다. 산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서둘 게 아무것도 없다.

2) 사랑이 떠났다고, 의욕이 없다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한한 슬픔에 빠지지 말자. 그야말로 부질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삶이 허무하고 무료하게 느껴지면 여행을 가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아니면 병원에 가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게 오히려 현명하다.



청신한 기분을 선사해 주는 바닷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이름 모를 애상들이 엷은 파도처럼 밀려와 일렁거렸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도 들고,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