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개망나니의 사색

026. 다시 바다에서 - 혼자 여행 온 그들에게서

이동권 2024. 3. 12. 17:19



가장 소중한 대화는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며 나누는 문답이다.



몇몇 사람들만 남은 선실의 풍경은 휑했다. 마치 활력을 잃은 도시 같았다.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몇몇을 빼고는 모두 주민들뿐이었다. 한쪽에서는 말이 오갔고, 한쪽에서는 무덤덤했다. 과장되거나 축소된 것 없이 진솔하고 진실한 삶의 풍경이었다.


여행객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모자를 꾹 눌러쓴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고뇌가 스며들었다. 겉으로만 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슬픔으로 잠식된 얼굴이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낚시꾼도 혼자였다. 속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일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면 인간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성과 지성이 마비된 짐승이었다.1)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자신을 잘 다스렸다.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깊은 사색으로 ‘자위적 공포’까지 겪는 시간을 가졌다. 이를테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같은 종류의 물음을 스스로 던졌다. 이런 문답을 나누면서 삶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또 우리가 왜 짐승이 되지 말아야 하는지, 필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발견했다. 그러나 우둔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짐승이 있는지 몰랐다. 알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우쭐했다. 짐승의 얼굴을 가리려고만 해 고통과 번민에 빠졌다. 나도 그랬다. 일하고, 돈 벌고, 건강을 이유로 엄살을 떨면서 일상을 보냈다. 안위와 영달을 위해 이기적인 관계를 쌓았다. 적당히 대처하고, 적당히 미화하고, 적당히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을 삶의 요령으로 착각했다. 그런 게 삶이 아니냐고, 사는 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변명도 했다.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바빠 죽겠다고 하소연도 했다. 


우매한 고집이었다. 자신과의 대화는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자신을 되돌아볼 마음만 있다면 바쁜 가운데서도 충분히 가능했다.2) 

 

자신과의 대화에 충실하다 보면 빈곤이 풍요로, 절망이 희망으로, 추종이 주체적으로 바뀌었다. 삶의 관점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사는 모양도 달라졌다.

 


1)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녀다.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을 모두 돌로 만드는 흉측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이었다. 여신 아테네에게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됐다. 사람에게는 모두 메두사 같은 면이 있다. 

 

2)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의 조각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가장 참다운 선에 가깝다. 그래야만 웃음과 유머를 무기로 사람들을 대하고,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며, 결말을 모르는 두려움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 아울러 삶의 가장 진실한 얼굴은 절박한 순간에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



나에게 물었다. 나 이외의 것에 얼마나 관대했고, 내 삶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얼마나 조심했는지. 얼마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 책임을 졌으며, 정치적이고 폭력적인 것들에 얼마나 올곧게 대했는지 곱씹어 봤다. 한숨이 푹 나왔다. 지옥에서 낚시 바늘이 내려와 나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