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44. 공안정국과 3당합당

이동권 2021. 11. 22. 13:34

시위 때 사용하기 위해 보도블록을 깨고 있는 학생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공안정국20)을 조성했다. 


당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은 1988년에 이어 1989년 들어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결성됐고, 산하의 조국통일위원회에서는 북한에 범민족대회를 제의해 통일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아울러 기층 민중들의 투쟁도 가열하게 진행됐다. 여의도 농민시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상경투쟁 등 다양한 부문의 투쟁이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공안정국의 시발점으로는 1988년 8월 6일 벌어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 테러사건21)과 1989년 3월에 있었던 김용갑 총무처장관 사퇴 사건22)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안정국 조성에 빌미를 준 것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23)이다.


노 정권은 문 목사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비밀리에’ 평양에 들어가 발표한 성명 중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 ‘남쪽 민중들은 독재세력과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구사하는 외세’ 등의 표현을 문제 삼아 문 목사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잠입죄로 의법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좌경세력 발본색원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공안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 방북 사건과 재야운동단체에 대한 전면조사에 들어가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6월 27일 서경원 의원 방북과 6월 30일 임수경 평양축전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 합수부24)의 권한과 역할을 더욱 강화했다. 


하지만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노 정권은 노동자들의 임금투쟁 현장에 마구잡이로 공권력을 투입했다. 합법적인 시위마저도 경찰병력을 동원해 원천봉쇄했으며, 1989년 5·4전국노동자 대회 때는 5·3 동의대 사건25)을 빌미로 노동자들을 연행하고 집회를 무산시켰다.


노 정권은 동시에 야3당과 물밑협상을 진행했다. 5공 청산을 전면에 내세우며 공안정국을 소멸시키려는 야 3당과 방북 사건을 빌미로 5공 청산의 수위를 낮추려는 노 정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 협상은 1989년 12월 15일 11개 항에 합의한 12·15대타협으로 마무리됐다. 


연이어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은 청와대 회동 직후 3당합당을 단행했다. 13대 총선의 여소야대 체제가 일시에 해체되면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3당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새로운 제도가 적극 추진됐다. 바로 내각제다. 


1990년 3당합당으로 의회정치는 실종되고, 각종 개혁입법이 좌절됐다. 정권과 의회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다시 권위주의적 정책이 등장했고, 국가보안법 등의 악법이 되살아났으며, 12·15대타협에서 합의했던 지방자치단체도 무기한 연기됐다. 또 임시국회에서 민자당 단독으로 국군조직법 개정안과 정부 추경예산안이 처리됐고, 26개 법안이 무려 30초 만에 날치기로 통과됐으며, 3당 합당 이전에 발의된 양심수사면복권특별법, 새마을운동본부폐지법, 안기부법 개정안, 삼청교육대특별조치법은 회기 내 처리되지 못하다가 13대 국회 임기 만료와 더불어 자동 폐기됐다. 


3당합당 이후 노 정권은 무소불위한 폭력을 앞세워 반대 정치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거세 작업에 들어갔다. 그 예가 바로 보안사사찰사건26), 범죄와의 전쟁선포27), 사노맹사건28) 등이다. 또 무노동무임금, 노동법 개정을 시도했고 공공시설에 대한 습격과 방화 시 무기 사용, 전국 경찰서에 M16과 실탄 지급, 불법 시위에 대한 공권력 투입 등 강경한 조치를 단행했으며 학내에서 벌어지는 학원자주화투쟁에 적극 개입해 정치투쟁에 나서는 학생 운동권들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다. 따라서 시국사범도 대량 발생했다. 이러한 탄압의 국면에서 강경대 타살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20) 공안정국은 의회와 선거 등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고 공안기구가 정국을 통치해 주도하는 방식이다.

 

21) 오홍근 사회부장 테러사건은 1988년 8월 6일 육군정보사 현역 군인들이 군사문화를 비판한 기사에 불만을 품고 중앙일보 오홍근 사회부장을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보사라는 정보기관에 의해 조직적으로 모의된 것으로 밝혀져 파장을 몰고 왔다.

22) 김용갑 총무처장관은 운동세력을 겨냥해 ‘좌경세력에 대한 강경대처’와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국회해산권 도입을 위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며 사퇴했다.

23) 전민련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3일까지 북한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정부의 허락 없이 비밀리에 참가했다. 문 목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 6일 사면됐다. 이 사건은 통일에 대한 남북 간의 논의와 조국통일운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고, 통일을 정치쟁점화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중심과제로 부각시켰다.

 

24공안합동수사본부(합수부)는 1989년 3월 25일 검찰기구를 중심으로 편제됐으며, 일련의 방북사건을 총괄 지휘했다. 대검공안부장 이건개를 본부장으로 전국 12개 지방검찰 공안담당 부장검사가 지역공안합동수사본부를 맡았으며, 관계기관들의 정책 협의를 위해 공안합동정책협의회가 설치됐다. 합수부는 문익환 목사 방북환영대회 및 남북교류제의 관련 18개 단체를 수사했으며, 좌경이념 출판물 일제단속, 북한동조 재야핵심단체 이념 분석, 재야 및 교사단체, 교육장 수사를 벌였다.

251989년 5월 1일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해 학교 부근의 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잡기 위해 실탄을 발사하며 주동자를 연행했다. 다음날 학생들은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경찰 5명을 도서관에 감금했고, 3일 새벽 경찰이 도서관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경찰관 7명이 숨지고 학생 77명이 구속됐다.

 

26보안사사찰사건은 1990년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양심 선언한 사건이다. 이 디스크에는 정치권을 비롯해 노동,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기록이 담겨 있었다. 보안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름이 기무사로 변경됐고 그 역할 또한 축소 됐다.

27노태우 정권은 각종 강력범죄 소탕을 명분으로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을 선포했다. 그 결과 범죄발생 건수는 감소했지만 실적 위주의 수사와 검거로 국민의 비판을 샀으며, 특히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져 반정부 시위가 거세졌다.

28사노맹사건은 안기부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목표로 한 맑스-레닌주의 조직으로 규정하고 조직원들을 일제히 구속 및 수배했던 사건이다. 사노맹은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장 출신의 백태웅과 노동자 시인 박노해 등이 중심이 돼 1989년 11월 12일 결성됐으며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의 타도와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사회주의적 제도로의 사회변혁, 진보적인 노동자정당의 건설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경대의 죽음에 항의하는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