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43. 여소야대, 의회정치의 부활

이동권 2021. 11. 22. 13:29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과 3당합당에 맞서 강고하게 싸우는 학생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자랑하던 민정당이 참패하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했다. 선거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지역 분할 구도 속에서 선거가 치러지고 민주화를 염원했던 1987년 6월 항쟁의 여파가 이어진 결과였다.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주도권을 뺏진 대통령은 정국 운영에서 수세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5공 비리, 광주항쟁, 부정선거 등 감추고 싶은 일들을 은폐하기 어려웠다. 


예상대로 의회는 각종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노 정권을 압박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5공 비리 특위’와 ‘광주 특위’였다. 5공 비리 특위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친인척, 5공 실세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또 광주 특위에서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맴돌았던 5·18 광주항쟁의 실상이 생생하게 밝혀지면서 국민들을 큰 충격 속에 빠트렸다.


의회의 권한과 역할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입법조치들도 제도화됐다. 국정조사와 국정감사, 고위공직자에 대한 국회의 임명동의권, 청문회 등과 같은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의 첫인사 조치였던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도 부결되기에 이르렀다. 정기승은 시국사건을 주로 맡아 독재정권에 우호적인 판결을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야 3당은 대통령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다. 


독재정권 하에서 정권유지를 위해 제정된 집시법, 정당법, 사회보호법 등의 악법도 ‘비민주법률 개폐 특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모두 폐지됐다. 아울러 국정감사가 16년 만에 부활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가 육영회 회장에서 물러나는 일도 벌어졌고, 심지어 이념적으로 예민했던 ‘양심수 석방 결의안’까지 채택됐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정권은 내부에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5공 청산 문제로 5공과 6공 세력의 힘겨루기가 촉발됐고,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내세웠던 공약 이행 여부를 둘러싼 중간평가를 놓고 6공 세력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은 정권의 누수현상을 막고, 6월 항쟁과 같은 국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자 5공 청산 문제를 조기에 마무리짓고자 했다.  


노 정권은 여소야대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와 강력한 폭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바로 ‘3당 합당’과 ‘공안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