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37. 감옥살이

이동권 2021. 11. 17. 16:21

강경대 열사 1주기

 

감옥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원래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몸에 결석증이 생겼고, 발에는 동상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경대를 죽인 백골단들과 함께 같은 교도소에서 생활하게 돼 괴로움이 심했다. 면회나 운동을 나가는 길에 이들과 마주치는 것은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심정을 아내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경대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전경들과 같이 있어요. 현 정권의 야수들이 별의별 고통을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저들이 하는 짓이 너무나 야비하고 수치스러워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그래도 참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어요. 이 땅에서 독재를 완전히 몰아내서 민중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고, 7천만 겨레가 한마음 한뜻으로 설 때까지 이 한 몸 바쳐 싸울게요.”


아버지는 악으로 버텼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경대가 못한 일도 하고, 노태우 정권이 쓰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봐야 경대를 다시 만나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교도소 쪽에서 더 편하게 해 준다고 배려해줘도 강하게 거절했다. 또 ‘내 아들을 죽인 것은 백골단, 저 젊은이가 아니라 폭력을 제도화한 정권’이라고 자신을 달래면서 오히려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아버지는 힘겨운 가운데에서도 함께 수감돼 있던 학생 양심수들이 꼭 경대 같아 보여 마음을 썼다. 그래서 경대의 생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학생들과 함께 조촐한 잔치를 열기 위해 면회 온 아내에게 음식을 부탁했다.


“경대 생일잔치를 할 테니 과일, 빵, 호두과자 서른 명 몫을 넣어줘요.”
“웬 음식을 그렇게 많이 넣으라고 해요?”
“교도소에 학생 양심수가 30명인데, 그 애들이 모두 내 아들이니 경대 생일잔치를 함께 할 거예요.”


아버지는 저녁 7시만 되면 날마다 연설을 하고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 여기에 들어온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니까 기어코 민주주의를 쟁취해서 나갑시다. 통일을 위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교도관들은 아버지를 제지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다 잡혀온 아버지를 거칠게 다룰 만큼 인면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회유는 계속됐다.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아버지를 설득했다. 


“여기서 사시면 되겠습니까. 잘못했다고 각서를 쓰면 바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받아쳤다. 
“노태우한테 먼저 잘못했다고 각서를 쓰라고 하시오. 그럼 용서해 주겠소.”
“그러지 말고 여기서 빨리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부탁하는 사람처럼 간곡한 말투였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음성은 더욱 커졌다. 


“나는 감옥살이를 하는 게 아니요. 나가서 강하게 싸우려고 훈련하고 있소.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도우려는 교도관도 있었다. 


한 교도관이 아버지가 수감된 방에 책 한 권과 거울을 넣어줬다. 며칠 후에는 시계를 넣어줬다. 또 볼펜과 종이를 넣어주었고, 편지까지 부쳐주었다. 그 당시 아버지에게는 연일 30~40통의 편지가 왔다. 아버지는 일일이 답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게 부족했다. 종이도 없었고, 밖으로 보낼 수 있는 편지는 하루에 딱 한 통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교도관의 호의에 ‘다른 방법으로 흠을 잡으려고 하나’ 의심을 했다. 교도관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로 교도관의 진심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아버지는 매일 노태우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는 시를 쓰고, 편지봉투에 숫자를 적어 집으로 보냈다. 아내가 면회 올 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교도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다른 수감자의 편지 중에 반정부적인 내용은 모두 검열을 받고 잘렸지만 자신의 편지는 온전했다. 한 통의 편지도 유실되지 않고 정확하게 집으로 배달됐다. 


어머니는 거의 날마다 남편을 면회했다. 평상시에는 잘 몰랐지만 경대 일을 겪으면서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어머니는 교도소에 수감된 남편의 건강이 걱정됐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수척해지는 뺨과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를 보면서 아픔을 따라 느꼈고, 면회가 끝나고 나올 때마다 못했던 말들이 생각나 다음 면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는 면회가 끝나면 유가협에 들렸다. 열흘에 한 번은 꼭 망월동에 찾아가 경대의 무덤에 꽃을 올렸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힘은 들었지만 더욱 굳건해지자고 마음을 다졌다. 경대의 한을 푸는 것이 가족의 도리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8개월의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감했다. 하지만 나오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교도관들은 아버지에게 교도소에서 입던 옷과 신발을 벗고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던 모습 그대로 나왔다. 교도관들이 뜯어말려도 소용없었다. 완강하게 버티는 아버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의 고집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옷과 고무신은 내가 쓸 게 아니야. 노태우, 전두환한테 갖다 줄거야.”


아버지에게서 이런 고집과 힘이 나온 이유는 단란한 가정이 파괴되면서 겪은 상처를 어떻게든 치유해 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온화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 자기 자신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행복도, 더 이상 파괴될 가정도 없었다. 자식을 눈앞에서 보낸 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짐승도 자기 새끼를 죽이려고 하면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던가. 아버지는 완전한 무(無)로 돌아갔다. 경대가 하고자 한 일, 그 길을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마지막으로 경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것이 경대를 살리는 길이고, 경대가 좋아할 일이라 믿었다.


훗날 아버지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됐을 때 자신의 수의와 고무신을 전해주겠다고 실제 서울 구치소에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투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이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이들이 역사의 심판대에 선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순간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장에 갈 마음은 없었다. 모든 일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순리대로 풀리길 원했다. 하지만 TV에 나온 이들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고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무작정 법원에 달려갔다. 방청권이 수십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재판이었다. 


한 시민이 아버지를 알아보고 방청권을 건넸다.


“이 재판은 경대 아버님 같은 분이 방청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금덩이 같은 방청권을 들고 재판장에 들어섰다. 


역시나 재판장에 들어온 전두환은 후안무치의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직도 대통령인양 관공서를 순시하는 것처럼 폼을 잡았고, 방청석을 돌아보면서 미소까지 짓기도 했다. 


아버지는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왔지만 꾹꾹 눌렀다. 또다시 법정모독죄로 끌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사가 휴정을 선언하고 두 전직 대통령이 허연 이를 드러낸 채 서로 악수를 하며 웃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 당신들은 스타가 아냐. 반역행위로 재판받고 있는데 어떻게 법정 안에서 그렇게 오만할 수가 있어. 양심이 있으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참회해.”


아버지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달라 들어 아버지를 폭행했다. 전 대통령의 두 아들과 측근들이었다. 


“저 놈 죽여라.”


아버지는 순식간에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전두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면서 발로 걷어찼다. 


아버지는 전치 3주 진단서를 받아 들고, 그들을 고소했다. 몸이 아픈 것은 참을 만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분노는 몸의 상처보다 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후 담당 검사가 찾아와 아버지에게 고소를 취하하라고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사과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범죄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피의자들은 모두 무혐의로 처리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분이 차 오른다.


“정의가 있는 세상이 아니었어. 한 마디로 참혹했지.”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은 12·12 및 5·18 사건과 비자금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다. 이어 서울고법은 항소심 공판에서 형량을 낮춰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해 원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피고인들이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협의를 거쳐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특별사면과 복권을 단행했다. 따라서 이들은 남아있는 형 집행을 면제받게 됐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다. 전두환은 2,205억 원의 추징금이 선고돼 312억 8,697만 원만이 집행됐으며, 노태우는 2,628억 9,600만 원이 선고돼 399억 원만 집행됐다.


아버지는 출소한 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민중운동에 투신하겠다고 생각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동지로 거듭나기 위해 민중의 아픔을 헤아리려고 했다. 


아버지는 먼저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강경대무료한방진료소’를 열었다. 한의사를 찾아다니면서 무료진료를 해보자고 권유했고, 치료에 필요한 비용은 자신이 부담했다. 이 진료소는 14년 동안 운영됐으며, 전국의 어려운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아버지는 경대와 같은 일을 당한 가족들의 일도 모두 도맡아 처리했다. 부모로서 자식을 잃은 아픔을 나눴고, 회유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주었으며,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누군가가 부르면 언제 어디서든지 달려갈 수 있도록 가방에 세면도구와 강연자료를 챙기고 다녔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도 만났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이나 의문사 진상규명은 이번 정부에서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어렵습니다. 꼭 이 정권해서 해야 합니다. 김 대통령께서는 민주화의 상징이 아니십니까.”


김 대통령은 아버지의 의견에 깊이 공감을 표했다. 


아버지는 한발 더 나아가 사재를 털어 지역 간 화합을 도모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진료사업을 벌이고,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자녀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복지법인을 만들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아버지는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민주공원을 설립하는 일을 꾸준하게 추진하고 있다.


경대의 유가족처럼 열성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있을까.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꼭 ‘돈’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다. 사회 변혁을 위한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경대 아버지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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