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앞에 짐승이 된 인간들 - 낙오하면 죽는다
평한선 철도가 열렸다. 주민의 고통과 죽음을 강요해 얻은 찰나의 평화였다. 사령관의 얼굴에서는 수치심이나 굴욕은 읽을 수 없었다. 군인들도 명령대로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처럼 굳었다.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책무는 버린 지 오래된 눈빛이었다. 그러나 일부 군인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는 따를 수 없었다.
장준하는 공산당이 중일전쟁을 틈타 대륙 곳곳에 세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현장에서 똑똑히 보고 느꼈다. 민심을 잃은 정부를 지지할 국민은 없었다.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인간이기 전에 짐승이기를 원했다. 정복자는 피정복자를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로 취급했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악독하고 잔인한 인간의 본성 앞에 철저히 파괴됐다. 한국에도 중국군 사령관과 비슷한 종자들이 있었다. 물질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제 동포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친일파들이었다. 장준하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선배 투사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인간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향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중국군은 평한선 철도를 건너기 위해 일렬로 늘어서서 천천히 이동했다. 장준하 일행은 선택해야 했다. 치욕을 견디며 중국군의 대열에 끼여 철도를 건너갈 것인지, 아니면 야음을 틈타 따로 행동에 옮길 것인지 고뇌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행 중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다. 수레도 끌고 가야 했다. 중국군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받을 필요도 없었다. 일행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면서 자연스럽게 중국군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군이 이동하자 여성들이 가마에서 내려 치마를 올리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바지까지 내린 채 엉거주춤 앉아 오줌을 싸고 재빠르게 가마에 올라탔다. 창피한 마음에 소변을 참고 있다가 갑자기 행군이 시작되자 서둘러 볼일을 해결했다.
전쟁은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저버리게 만들었다. 스무 살 전후 처녀들의 수치심도 총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얼굴을 붉히지도, 날카로운 적의도 없었다. 행군 대열에서 벗어나면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이 이들의 체면이나 위신까지 버리게 만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뜀박질 - 무의식 속의 구보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을 따라 흙먼지가 풀썩거리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아이들과 밀가루를 실은 수레를 밀고 끌며 바퀴가 달캉거리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드문드문 보이던 인가가 사라지고 눈앞에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몸 하나 숨길 곳 하나 없는 황량한 광야였다. 혹시라도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모두 죽음이었다. 장준하는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와 심장에 박힐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장준하는 중국군에 몸을 맡기고 어금니를 물었다. 예고 없이 닥쳐올지 모르는 불행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중국군과 일본군의 협상은 끝났다. 검문도 없을 것이고, 똑같은 군복을 입은 사람 중에서 한국인을 꼬집어 내긴 어려웠다.
평한선 철도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앞에서부터 중국군이 뛰기 시작했다. 장준하 일행도 일제히 중국군의 뒤를 쫓았다.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낙오였다. 중국군이 속도를 높이자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점점 뒤처졌다. 수레에 여럿이 달라붙어 밀고 끌었다. 수레는 행렬에서 멀어지지 않고 바싹 따라붙었다.
일행은 중국군의 뒤통수만 보고 무의식적으로 뛰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달렸다. 인간은 위대했다. 처절한 격투와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질하는 것이 인간이었고, 전쟁 중에는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살아남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존법칙이었다. 일행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서글픔이 묘한 힘으로 작용해 쉬지 않고 뛰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한겨울의 북풍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숨차게 달렸다.
20km 정도를 뛰자 발바닥에 자갈이 밟히기 시작했다. 철도 근방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총을 들고 양 옆으로 사열한 일본군이 보였다. 조금만 더 뛰면 일본군의 총칼에서 벗어나 충칭으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장준하 일행은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일본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후다닥후다닥 철도를 건넜다.
중국군은 철도를 건넌 뒤에도 계속해서 뛰었다. 장준하는 중간걸음으로 걸으면서 대열 후미로 왔다. 쫓아오지 못한 일행이 있는지 일일이 머릿수를 헤아렸다. 낙오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선발대의 임무 - 검은 산, 성
장준하 일행은 평한선 철도를 건넌 뒤 일본군 관할지역에서 벗어나자 천천히 중국군 대열에서 빠졌다. 중국군은 누가 행렬에서 이탈한지도 모르고 앞만 보며 뛰었다. 갑자기 내린 폭우에 죽을 둥 살 둥 도망치기 바쁜 개미떼 같았다. 일행은 20리를 걸어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워 보였다. 잠자는 아이의 얼굴처럼 고요하고 포근했다. 그러나 이곳도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비켜갈 수 없었다. 간간이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피비린내는 살육의 전조가 야금야금 엄습했다. 주민들도 포성과 화마가 언제 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유순하고 마음씨 착해 보이는 한 노인이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노인은 마을의 보장(면장)이었다. 보장은 일행을 마중 나와 정정히 인사했다. 군복을 입은 중국군들이 반가울 리 없었지만 주민들의 안정을 부탁하기 위해 일부러 격식을 차렸다. 장준하는 마을의 보장에게 중앙군관학교의 서한을 보여주며 숙소를 부탁했다. 보장은 서한을 꼼꼼하게 읽은 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 군인들이 아니었다. 보장은 자기 집 헛간과 마당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일행은 오랜만에 밥을 지어먹었다. 평한선 철도를 건너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할 평온의 시간이었다.
장준하는 원활하고 안정적인 행군을 위해 인원을 4조로 나눴다. 1조는 선발대였다. 일행보다 먼저 나서서 숙소를 잡고 취사를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위험요소를 확인하는 정탐 역할도 했다. 장준하는 중앙군관학교에서 취사 담당자였기에 선발대 대장이 됐다.
선발대는 수레에 밀가루를 싣고, 간단한 식량은 자루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장준하는 여장을 챙기면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투철하게 정신을 무장했다. 선발대의 행보에 일행의 운명이 걸렸고, 그는 충칭으로 가는 시련 앞에 지혜와 양심, 인내를 시험받고 있었다.
예감은 딱 들어맞았다. 좀처럼 마땅한 숙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선발대는 걷고 걸었다.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8시간을 걸어 어두컴컴한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일 년 내내 해가 들지 않아 침엽수만 자생하는 산이었다. 하늘마저도 찌푸려 대낮인데도 침침했다. 길은 울퉁불퉁해서 수레바퀴가 자꾸 바위틈에 끼었다. 선발대는 수레와 씨름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빼앗긴 식량과 보따리 - 애걸복걸
비좁은 나뭇가지 사이로 산성이 보였다. 골짜기 협곡 사이에 바위로 성벽과 성장을 쌓은 천혜의 요새였다. 높이도 꽤 높았고 구조는 견고했다. 현판이 걸려 있지 않아 산성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수천 년 전에 세워진 산성이 분명했다. 선발대는 수레를 적당한 곳에 세워 놓고 산성을 향해 힘껏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하룻밤 묵을 숙소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산성은 문이 굳게 닫혔고, 파수병은 총을 들고 성문을 지켰다. 선발대는 성문을 두드리며 대장과 만나고 싶다고 파수병에게 외쳤다. 파수병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돌아가라고 했다. 몇 번을 부탁해도 파수병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선발대는 파수병이 보이는 곳에서 대기했다. 이대로 물러가지 않으면 밤이 되기 전에 대장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속 타는 기다림이 하염없이 계속됐다.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 산에 짙게 어둠이 깔렸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뒤늦게 출발했던 일행 모두 산성 앞에 모였다. 장준하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대장을 만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눈 내리는 골짜기에서 노숙해야 했다. 그는 다시 파수병을 찾아가 대장 면담을 요청했다. 파수병은 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대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파수병은 일행을 대표해서 2명만 들어오라고 했다. 장준하는 중국어를 잘하는 선우진과 함께 대장을 만났다. 그러나 대장은 이들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뻥뻥 큰소리를 치며 노기발발했다. 장준하는 물러서지 않고 중앙군관학교 서한을 보여주며 중국군이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충칭으로 가는 한국군이라고 말했다. 하룻밤만 묵게 해 주면 조용히 떠나겠다고 부탁했다. 그래도 대장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게 웃더니 부하들에게 두 사람을 잡아 가두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어깨를 단단히 잡힌 채 끌려 나와 성안의 움막에 갇혔다. 벌써 그곳에는 일행 전체가 모여 있었다. 수레에 실린 식량은 모두 빼앗겼고, 보따리도 모두 압수당한 뒤였다. 움막 밖에는 집총 한 사람들이 층층이 경계를 섰다. 장준하는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살아서 나간다고 해도 식량 없이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 답답했다. 장준하는 무서움증이 들었다. 충칭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까마귀밥이 될 처지였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파수병에게 대장 면담을 다시 한번 요청했다. 파수병은 장준하의 우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대장과 만남을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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