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배신한 연극인 - 연극의 막이 올랐다
전야제의 막이 올랐다. 연극은 노능서의 농익은 연기로 단숨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관은 변사로 참여해 중국어로 상황이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연극은 중국군과 동지들의 환호와 박수로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장준하는 열화와 같은 성원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에 나선 연극인들을 봐왔던 터였다.
일본은 한일합병 후 친일 동화주의에 입각해 한국을 직접통치체제로 지배했다. 한국의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관습, 언어에 이르는 모든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철저한 일본화, 일본인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출, 증산 등의 경제적 수탈을 높였고, 한국인들을 침략전쟁에 동원시키기 위해 공연예술을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출세지향적인 연극인들은 일제의 요구에 부응했다. 유치진이 대표적이었다.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은 창립 공연으로 1941년 친일 작품 ‘흑룡강’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 그는 한국 연극계 최고 권력자가 됐고, 일제의 지시를 받고 시찰과 강연에 나섰다. 일제 식민지 초기에는 자발적 친일은 많지 않았다. 연극인들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제에 저항했다. 하지만 식민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연극인들이 전향했다. 1939년 협동예술좌, 1940년 조선연극문화협회 등은 일제의 국민총동원운동본부산하기구로 활동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친일의 정점은 바로 ‘연극경연대회’였다. 이 대회는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매일신보사 등이 후원한 관제행사였다. 제1회 대회까지는 유치진의 작품 ‘대추나무’가 작품상을 수상한 것 빼고는 노골적인 친일 성향은 없었다. 그러나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부터 조선총독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노골적인 친일 체제 행사로 전락했다. 총독부 정보과는 생산확충, 징병제도, 육해군지원병제도, 일본정신을 강조한 작품으로 경연 주제를 명확하게 지정했다. 또 조선극뿐만 아니라 1막짜리 국어극(일어극) 경연을 별도로 시행했다. 연극에서 국어상용화정책을 시험해 보자는 의도였다. 조선 8개 극단은 이 행사에서 일제의 정책에 철저히 부응했다.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징병제 예찬 같은 주제의 연극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며 친일예술인 대열에 합류했다.
친일 신문과 <등불> 그리고 졸업식 - 중국군 육군 준위로 임명되다
김준엽은 졸업식 전야제에서 연사로 나와 혈기 넘치는 목소리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비판했다. 한국광복군훈련반을 개설해 조국 독립에 도움을 준 중국군에도 고마움을 표했다. 홍석훈은 정감 넘치는 목소리로 한국의 옛 가요를 독창했고, 진경성은 단아하고 절제된 고고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전야제 마지막은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전체가 무대에 올라 독립군가를 합창했다.
풍성한 내용과 열성적인 공연에 감복한 중국군 관객들은 일제히 환성과 박수갈채, 휘파람을 쏟아냈다. 오래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준 한국광복군훈련반 대원들에게 보내는 명랑하고 요란스러운 반응이었다. 장준하는 예술제로 한민족의 결속력과 자긍심을 보여준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다음날 졸업식이 열렸다. 장준하는 중국군 육군 준위에 임명됐다. 그는 장교 계급장을 달자 쑥스러웠지만 하루빨리 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앞서 한없이 기뻤다.
장준하는 졸업식 날 <등불> 제2호를 발간했다. 그는 <등불>을 먼저 보겠다고 옥신각신하는 동지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서는 <조선일보>와 같은 친일 신문이 판을 치고 있을 때 <등불>은 그 이름 그대로 동지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조국 독립의 염원을 불어넣었다.
<조선일보>는 처음 창간될 때 재정상황이 어려워 인쇄기를 돌릴 돈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친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932년 만주동포를 위한 의연금을 빼돌려 쓰다 적발된 뒤 일제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됐고, 이후 고리대급업자인 방응모에게 넘어가면서 친일 성향으로 돌아섰다. 방응모는 1937년 8월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은 지나(중국)의 베일을 절멸케 하여 극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고 말하는 등 침략 정책에 협력했다. 특히 1944년 비행기를 헌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창립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했다.
<동아일보>의 창업주 김성수도 친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성수는 1943년 8월 5일 자 <매일신보> 기고문에서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의 신민이 됐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학도병 지원을 장려했다. 그는 일본이 전시총동원 체제에 맞춰 설립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이사로 활동했다.
충칭을 향한 항변 - 김학교 주임과의 갈등
장준하는 중앙군관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충칭으로 떠나는 꿈에 부풀었다. 3개월 동안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내일을 위해 그런 시간이 꼭 불필요하진 않았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가쁘게 몰아쉬었던 숨을 한 번쯤 고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충칭으로 가는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김학교 주임이 훈련반 동지들에게 충칭으로 떠나지 말고 린촨에서 함께 일하자고 무리한 제안을 했다. 김 주임은 충칭에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교육을 위해 파견 나온 간부였다. 장준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훈련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갖가지 문제들에 물러서지 않고 해결해 왔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임시정부로 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활력을 재충전하는 것은 길어도 1주일이면 충분했다.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자가 돼야 했다. 허송세월로 보낼 수 없어서 강의도 준비하고, <등불>도 발간하고, 동지들의 어려운 사정도 해결하면서 참아 온 3개월이었다.
김준엽이 대표로 나서 김 주임과 단판을 지었다. 일본군에서 탈출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수모들을 인내했던 건 충칭에 가려는 목표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목표를 수정할 수 있었다. 당초 목표한 대로 진행해도 별다른 장애물이 없는 상황에서 중앙군관학교에 머물라는 소리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라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김준엽의 목소리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찼다.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고한 결심이 느껴졌다. 김학교 주임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13명은 김 주임과 함께 남아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들을 비롯해 애국투사들을 규합하는 공작대 임무를 맡기로 했고, 장준하를 포함한 53명은 한국의 조직적 독립운동의 중심체였던 임시정부로 떠났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정부였다. 정부는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지고 국제법을 준수할 능력을 보유해야 다른 나라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본이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고, 해방 후 미군정이 정부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불만을 꺼낼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싸움 - 행군의 시작
눈보라가 혹독하게 휘날렸다. 사나운 북풍이 몰아치자 소나무 숲은 융융 대며 소리를 냈고, 연병장에는 소용돌이가 코를 떼어 갈 듯 용솟음쳤다. 현관과 창문 사이에도 허옇게 성에가 끼었다. 장준하 일행은 황막하게 쏟아지는 눈보라를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 성난 맹수처럼 달려드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떠나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일행은 여장을 꾸리고 곧장 중앙군관학교를 떠났다. 지체할 틈이 없었다. 제 아무리 하늘이 진동해도 갈 길은 가야 했다. 길 잃은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면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이 겨울이 다 가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강추위가 동지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함께 힘을 모으면 이겨 내지 못할 게 없었다.
한여름 쓰카다 부대에서 탈출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초록으로 물든 숲은 앙상한 뼈만 남았고, 유유히 흐르던 강물도 얼어붙어 멈췄다. 광활한 벌판은 새하얀 눈으로 덮였고, 만물은 꽁꽁 숨어 미동조차 없었다. 일행은 펄럭이는 옷깃을 부여잡고, 덜덜 몸을 떨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면 추위가 엄습했다. 쉬지 않고 걸어야 몸의 체온이 유지됐다. 린촨에서 충칭으로 가는 여정은 대략 3개월이 소요됐다. 장준하는 곧 있으면 가장 혹독한 싸움과 맞서게 될 것을 예상했다. 날씨와의 싸움, 본능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이 펼쳐질 것이었고, 갑자기 일본군이 나타나 공격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의 사투일 뿐이었다. 고난과 역경은 이겨 내면 그만이었다. 충칭에 도착한 뒤가 더 문제였다.
장준하는 충칭으로 가지 말라는 김학교 주임의 얘기를 한참 동안 되뇌며 걸었다.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자기 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집착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에 치를 떨던 김 주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김 주임은 훈련반 동지들에게 충칭의 지리멸렬한 속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김구 주석과 이청천 독립군 사령관에 대한 찬사는 아끼지 않았지만 그 외의 정당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충칭에 가봐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설득했다.
장준하는 아직까지도 임시정부에서 파벌 싸움과 권력 쟁투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김 주임의 말이 사실이라면 6천리 경장행군은 쓸데없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로만 듣고 속단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싸워서라도 뜻을 바로 세워야 할 책무도 있었다.
'책 > 칼로 새긴 장준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29. 장준하 일대기 16 - 길고도 험난한 길을 앞만 보고 달리다 (0) | 2023.08.25 |
---|---|
028. 장준하 일대기 15 - 탐욕과 횡포에 치를 떨다 (1) | 2023.08.24 |
026. 장준하 일대기 13 - 동지애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 (0) | 2023.08.24 |
025. 장준하 일대기 12 - 내면의 갈등을 겪다 (0) | 2023.08.11 |
024. 장준하 일대기 11 - <등불>을 발간하다 (0) | 2023.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