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30. 장준하 일대기 17 -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다

이동권 2023. 8. 31. 23:56

도적의 마음까지 움직인 진심 - 천명인가 보오

장준하는 대장을 만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장정에 나선 일행들을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눈가는 눈물로 촉촉하게 젖었고, 목소리는 메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는 투사를 믿을 사람은 없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나았다. 대장은 장준하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장준하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애원해도 어림없다는 듯 강경했다. 


장준하의 통사정은 서너 번이나 이어졌다. 그는 파수병에게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찰떡같이 매달렸고, 대장을 만난 뒤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게 해달라고 동정심에 호소했다. 그때마다 대장은 딴전을 피우며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얼마지 않아 장준하의 진심은 통했다. 장준하가 하도 사정하는 바람에 대장은 손사래를 치며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일행에게 빼앗은 수레와 식량도 모두 되돌려줬다. 그를 움직인 건 장준하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충정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반대쪽 성문으로 빠져나와 빠르게 걸었다. 대장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일행의 등을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었다. 산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다. 일행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장준하는 대장을 설득하면서 소중한 것을 배웠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진심을 털어놓는 것과 같았다. 정치라는 것도 국민과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민심을 얻지 못하면 결국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살다 보면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사건사고와 맞닥뜨리며 손을 더럽히는 일이 생겼다. 등쳐먹는 사기꾼에 속아 홀라당 빈털터리가 되는 일도 발생했다. 돈푼깨나 있는 작자들과 어울리다 보면 비양심적인 짓에 빠지기도 했고, 잘해보려고 했던 일들이 나쁜 결과로 이어져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심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었다. 비록 비참하고 곤궁한 결론에 이르더라도 자신에게 떳떳한 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건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밀가루빵을 손에 쥐고 조금씩 뜯어먹으면서 걷고 걸어 어두컴컴한 골짜기에서 벗어났다. 골짜기에서 나왔지만 날씨가 흐려서인지 하늘은 거무죽죽했다. 일행은 저녁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장준하는 마을 보장을 만나 산성에서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보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탄성을 질렀다. 운이 나빴으면 일본에게 팔리거나 죽었을 운명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처럼 잠에 취한 밤 - 흙방에서 잠을 자다

장준하는 일본군과 내통하며 도적질을 일삼는 산성 마적단에게 아무런 피해 없이 빠져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잘못했으면 꼼짝없이 저승길로 갔겠다 싶어 가슴이 후르르 떨렸다. 


일행은 보장이 마련해 준 숙소에 들어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그러뜨렸다. 두 다리를 길게 펴고 벽에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서로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팽팽하게 감돌던 긴장감이 천천히 이완되면서 일행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숙소는 무척 열악했다. 흙을 바른 집에 바닥에는 지푸라기가 깔렸다. 방안은 겨울밤의 한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사나운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을 빼면 바깥 날씨와 다르지 않았다. 몇몇이 어깨를 움츠리며 지름 1미터가 넘는 화로에 숯을 피웠다. 희뿌연 연기와 은은한 열기가 방안에 퍼지면서 추위는 금방 가셨다. 덜덜 떨리던 입술에도 핏기가 돌았고, 굳었던 손발도 부드럽게 풀렸다. 


일행은 화롯가에 둘러앉아 다리 주무르기에 열중했다. 땅땅하게 뭉친 근육을 손아귀에 힘을 주고 지근지근 눌렀다. 쿡쿡 쑤시는 아픈 다리를 풀어 줘야 그나마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었다. 장준하는 마음이 안정되고 온기가 느껴지자 졸음이 밀려왔다. 일행도 줄줄이 늘어지게 하품을 쏟아냈다. 몇몇은 벌써 새우잠에 빠졌다.


장준하는 이른 새벽잠에서 깼다. 바람이 가마니로 짠 문을 흔들며 떼걱대는 통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갑자기 옆구리가 시렸다. 무릎도 찌릿찌릿 저렸고, 콧마루도 시큰했다. 바닥을 만져보니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스럽게도 방안의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모두들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꿈틀거렸다. 


보장은 장준하 일행이 잠에서 깨어났는지 몇 번을 찾아와 확인한 뒤 때늦은 아침식사를 내놨다. 늦잠을 자던 일행들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식사는 걸쭉한 옥수수죽과 장아찌가 나왔다. 일행들은 모처럼 맡는 구수한 음식냄새가 반가워 입맛을 다셔가며 옥수수죽을 후루룩 마셨다. 알맞게 곰삭아 달달한 장아찌 맛도 일품이었다.

깊은 잠을 방해한 낯선 손님 - 가려움

장준하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난양으로 향했다. 난양에는 중앙군 부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보급품을 받아야 다음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보장은 손을 흔들며 인자한 미소로 일행을 전송했다. 


선발대는 두세 시간 앞서 길을 나섰다. 하루를 푹 쉬고 나섰지만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견딜 수 없는 피로에 정신이 잠식되고 말았다. 한 번 긴장을 내려놓자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기 힘들었다. 마을에서 닷새 정도만 걸으면 난양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했다. 선발대 인원은 계속 교체됐다. 보장과 협상해 숙소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일행의 저녁식사도 준비했기 때문에 노동 강도가 셌다. 그러나 장준하는 항상 선발대에 참여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했다. 일행도 장준하를 워낙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가 먼저 나서 주기를 바랐다. 식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이었다.


선발대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우거진 산길을 지나 개울물이 고이는 빨래터에 당도했다. 좌우로 퍼진 구릉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마을은 작은 시장이 설만큼 인구수가 제법 됐다. 장준하는 보장을 찾아가 잠자리를 부탁했다. 보장은 장준하 일행의 인원수를 듣고 큰 막사를 내주었다. 소와 돼지를 키웠던 우리였다. 장준하는 곧바로 일행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으로 나가 소고기와 채소를 구입해 국을 끓였다. 그가 중앙군관학교에서 취사 담당을 맡아 처음으로 내놓은 음식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일행은 오랜만에 직접 끓인 음식을 나눠 먹으며 피로를 풀었다. 장준하는 난양까지 갈 동안 낮에 먹을 음식도 준비했다. 행군 도중에 취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심은 전날에 준비하는 게 통상적이었다.


잠은 헛간에서 나뭇가지를 깔고 잤다. 나뭇가지는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똑똑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꺾어 놓은 지 오래돼 쾨쾨한 냄새까지 풍겼다. 그래도 찬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 나았다. 일행은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다. 자다 말고 일어나 인상을 쓰며 팔과 다리를 긁적거렸다. 피부가 헐 정도로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진물이 툭툭 터져 나왔다. 옴이었다. 일행의 몸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진드기에 물려 벌겋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옴은 손가락과 발가락사이,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같은 연한 살부터 짓무르게 만들면서 전신으로 퍼졌다. 차라리 옻이 오르는 게 나았다. 옻은 옻나무에서 나는 진이 피부에 노출돼 두드러기가 돋고 가려움을 유발했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도 않았고 진물도 나지 않았다. 

벌거벗은 사내들 - 돼지기름과 유황

옴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얼마나 가려웠는지 염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들끼리라 거리낄 게 없는 듯싶었다. 옴에 오른 일행들은 옷을 홀라당 벗어 재끼고 유황을 넣고 끓인 싯누런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랐다. 유황 먹은 돼지기름이 옴에 효능이 있는지 어느 누구도 확신하진 못했다. 재래 민간 치료제라는 말만 듣고 중국인에게 구입한 것뿐이었다. 옴이 오르지 않은 이들은 벌거벗은 남자들의 몸짓이 우스꽝스러워 히들히들 웃었다. 탈만 쓰면 딱 광대놀이의 한 장면이었다. 옴이 오른 일행들이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몸을 긁어대며 걷다 보니 예정보다 하루 늦게 난양에 도착했다. 


중국군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전쟁 중이라 모든 물품이 부족했다. 식량은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고, 탄약이나 의약품조차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장준하 일행은 보급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난양에서 2주 동안 머물러야 했다. 보급을 받지 않으면 행군은 더 이상 어려웠다. 일행은 보급품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마을에 방을 세 개 빌렸다. 한 방에는 세 가족과 여자 여섯이 잤고, 나머지 두 방에는 남자들이 나뉘어 들어갔다. 방은 움막이나 다름없었다. 방음도 되지 않았고, 바닥은 나무 등걸로 짠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돗자리에는 벌레가 가득했다. 그러나 일행은 바닥에 진드기가 기어 다니는지 모르고 누워 잠을 청했다. 진드기들은 또다시 한밤중에 피잔치를 벌였다. 일행들의 피부를 물어뜯고 쏘아대며 피를 물씬 빨아먹었다. 


일행들은 가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둘씩 잠에서 깼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짜증 끝에 소리를 꽥 지르며 손톱이 닿도록 긁는 것이 전부였다. 날이 밝자 이들은 진드기를 잡는데 혈안이 됐다. 진드기가 발견되면 손톱으로 꾹 눌러 압사시켰다. 진드기 몸은 순식간에 딱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붉은 피를 쭉쭉 뿜어냈다. 하지만 투명하고 작은 진드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돗자리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데다 진드기 알은 너무나 잘아 보이지도 않았다. 돗자리를 불태우지 않고서는 섬멸하기 힘들었다.


장준하와 김준엽만 빼고 모든 사람들의 몸에 좁쌀 같은 옴이 수두룩하게 올랐다. 연약하고 희끄무레한 사타구니 쪽 피부가 특히 심했다. 일행들은 모두 옷을 훨훨 벗어던지고 유황 기름을 손에 발라 전신을 문질렀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때를 미는 모습이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이들은 몸에 기름을 바른 뒤 방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녔다. 옷에 기름이 스며들까 봐 잠을 잘 때도 그대로 벌렁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