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과의 차별 - 총 없는 군대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은 린촨 중앙군관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군사훈련부대였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장제스가 군관학교 내 한국인을 위한 훈련부대를 승인한 뒤 이곳에도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이 개설됐다. 하지만 군사훈련은 형편없었다. 중국군의 훈련과 달리 한국군에게는 목총 한 자루 지급되지 않았다. 고막을 터트릴 듯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총이나 박격포 소리는 중국군이 훈련할 때 나는 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교육도 형식적이고 질이 낮았다. 교련은 아주 간단한 제식훈련만 가르쳤다. 소학교 다닐 때 이미 배웠던 발맞추는 보법이나 구령에 맞춰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강의도 배울 게 없는 정신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정규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훈련병들에게는 함량 미달 수준이었다.
한국인 훈련병들은 임자 없는 나룻배 신세였다. 이들은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의를 이국땅에서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강의와 <등불> 편찬, 고구마 밤참으로 고충을 달랬다. 강의와 <등불>은 지속적으로 훈련병들을 일깨우고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구마 서리는 들쭉날쭉했다. 운이 나쁘면 빈 밭을 헤매다 끝나기도 했고, 보초를 서는 농부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 고구마 수확이 끝난 뒤에는 고구마를 맛볼 길이 전혀 없었다.
훈련병들 사이에 쌓인 불만은 중앙군관학교로 향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광복군 유격대에 참여하길 원했다. 삶에 허무를 느낀 훈련병들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소시민으로 살기를 원했고, 고향에 가서 농부가 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다. 학교 측에 중국인과 평등하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학교에서 한국인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구박과 무시가 없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일이었다.
교장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동등하게 대하겠다고 입버릇 말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교칙을 준수하고, 보편타당한 원칙 아래 학교의 모든 운영방침을 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현실은 판이했다. 먹는 것에서부터 훈련까지 모든 게 제 나라 국민에게 맞춰졌다. 중국군에게는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혁명 전사를 양성한다는 자부심에 맞게 최상급 대우를 했다.
두 동지의 난행 - 새벽 2시의 소란
한국인 훈련병들의 답답한 심정은 난행으로 이어졌다. 가느다란 희망조차 묵살된 현실이 갑작스레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자라나 버렸다. 장준하는 실의에 빠진 동지들을 위해 새로운 활력소를 찾으려 했다. 동지들이 맥 빠지고 힘겨운 조건을 딛고 일어서서 조국 독립의 밀알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하지만 제약이 많은 상황인지라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동지 두 명이 낭패감에 젖은 상태로 민가를 돌아다니며 술을 강탈해 마시고 만취 상태에서 온갖 추태를 부렸다. 술 취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부리는 물의가 아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험한 욕설을 내뱉고, 아무 데나 오줌을 갈기고, 길거리에 벌러덩 누워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일본도로 개를 무 베듯 죽여 버렸고, 주민들을 위협했다. 건장한 청년들이 칼을 들고 린촨 거리를 활보하자 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와들와들 떨었다.
두 동지의 난행은 중앙군관학교에 돌아와서도 계속됐다. 잠을 자는 동지들을 발로 차 깨운 뒤 포악스럽고 무지막지한 폭언을 늘어놓았고, 칼을 휘두르며 모두 베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훈련병들은 이들의 잔인한 표정에 놀라 혼비백산 도망을 쳤고, 미리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은 구석에 모여 두 동지의 행패가 끝나기만을 부르르 떨며 기다렸다. 난폭한 언행은 서너 시간 뒤 끝났다. 미칠 듯이 모든 힘을 쏟아버리고 나니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두 동지는 무장한 중국군에게 연행돼 영창에 갇혔다. 장준하는 고통스러웠다. 중국인을 강박하는 것도 모자라 동지들에게까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겪었다. 그는 이들의 난행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모든 원인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고, 계획적인 범죄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벌어진 난동이었다.
영창 생활은 훈련병 생활보다 더욱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하루에 한 끼만 밀가루빵 1개와 멀건 배춧국이 배식됐다. 장준하는 두 동지를 위해 사식을 준비했다. 이들은 그가 챙겨주는 사식을 허겁지겁 먹은 뒤 손을 붙잡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자신들의 실수를 뼈저리게 뉘우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울먹였다. 장준하는 사식을 챙겨주고 뒤돌아 나오는 길에 항상 울었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게 만든 일본을 떠올리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끝없는 동지애와 조국 독립의 약속 - 두 동지를 위한 항변
장준하가 두 동지의 사식을 챙겨주는 동안 세 사람 사이에 끈끈한 동지애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잠자리는 달랐지만 서로의 가슴에 동병상련의 고통이 꿈틀댔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뜨거운 동지애가 절실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고 해서 각자도생을 선택해 버리면 독립의 길은 요원했다. 함께 뭉쳐 투쟁해도 될까 말까 했다.
영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두 동지가 중앙군관학교를 떠나 중국 육군형무소로 이송된다는 얘기였다. 육군형무소에 들어가면 굶겨 죽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이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자 장준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아픔이 찾아왔다. 어떻게든 두 동지가 형무소에 끌려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훈련병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해도 죽음을 방치하는 형무소에 보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두 동지가 조국 독립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그 결기를 허망한 죽음으로 대신할 수 없었다. 장준하는 <등불>을 함께 편집했던 동지들을 찾아가 구명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동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시정잡배나 협잡꾼보다 못한 행동으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의 사기를 꺾고 더 나아가 조국을 욕보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준하는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전원을 강당에 불러 모아놓고 마음을 전했다. 눈물을 쏟아내면서 두 동지가 형무소에 끌려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과거의 과오 때문에 자기편인 동지들에게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꾸짖으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보여 달라고 말했다. 또 두 동지가 벌인 행패는 결코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훈련병 모두의 죄라면서 군관학교에서 총 한 번 들지 못하고 몇 개월을 허송세월로 보냈던 비애를 함께 느껴보라고 다그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장준하의 연설은 훈련병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자기감정에만 치우쳐 진정 중요한 것을 놓쳤던 자신을 성찰했다. 바로 끝없는 동지애와 조국 독립의 약속이었다. 훈련병들은 모두 그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곧바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전체의 의견은 모아졌고, 두 동지의 석방을 군관학교에 요청했다. 학교 측은 이들이 저지른 모든 책임을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전원이 공동으로 진다는 다짐을 받고 석방을 허락했다.
처량한 학도병 신세 - 능서야! 내 아들아
중앙군관학교 4개월 초급반이 끝났다. 한국광복군훈련반은 그동안 특별하게 배운 게 없었지만 중국군과 함께 졸업했다. 뒤늦게 합류한 장준하 일행은 3개월 만에 교육을 마쳤다. 중국군은 졸업실에서 총지휘관의 지시에 맞춰 대규모의 사열을 준비했고 팀을 조직해 총검술, 유격시범 등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한국광복군훈련반은 졸업식 전야제에서 예술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준하는 졸업 전 <등불> 2호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등불>을 펴 들고 무료함을 달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창간호 발행과 동시에 <등불>의 맥이 끊기는 건 스스로 용서가 안 됐다.
전야제에서 선보일 연극은 노능서의 일화를 각색하기로 했다. 그는 홀어머니를 두고 학도병으로 징집된 뒤 일본군에서 탈출해 중앙군관학교에 왔다. 강제 징병 때문에 어머니를 지척에서 모실 수 없었던 그의 운명은 학도병의 처량한 신세를 그대로 대변했다.
일본은 1943년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지원병 제도를 실시했다. 그러나 지원이 부진하자 관제행사를 열어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다. 문인들을 대상으로는 학도병 권유를 권유하는 글을 쓰게 하거나 연사로 동원했다.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친일파 숙청 때에도 건재함을 과시하며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로 활동했다.
연극 대본은 김준엽이 맡았다. 노능서가 실제로 겪은 일들을 연극에 맞게 살을 붙여 비극적으로 각색했다. 줄거리는 아들의 강제 징병된 소식을 듣고 쓰러진 어머니와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주인공이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 침투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장준하는 연출을 맡았다. 교사로 재직할 때 아이들의 연극 수업을 지도한 적이 몇 번 있을 뿐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경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주연은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 노능서가 맡았고, 주변 인물로 10여 명이 참여했다. 훈련병들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쳤다. 특히 일본군이 학도병을 구타하거나 괴롭히는 장면을 실감 나게 연기하는 바람에 노능서의 몸에 피멍까지 들었다. 장준하는 연기에 크게 참견하지 않았다. 아주 이상하거나 정리가 필요한 부분만 조언하며 무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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