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칼로 새긴 장준하

028. 장준하 일대기 15 - 탐욕과 횡포에 치를 떨다

이동권 2023. 8. 24. 17:12

고생스럽지 않은 길 - 눈 쌓인 협곡을 돌아

장준하 일행은 벌판을 지나 골짜기에 접어들자 얼굴을 쳐들고 걸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거친 눈보라가 얼굴을 쳐 갈겨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눈보라가 진눈깨비로 바뀔 때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와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행은 독한 백주 한 모금이 그리웠다. 독주를 마시면 긴장이 풀리며 발걸음이 가벼울 듯싶었다. 백주는 보리나 옥수수를 증류한 술로 도수가 40도가 넘었다. 숙성을 오래 시키기 때문에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강해 추울 때 마시면 제격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장준하는 따뜻한 쌀밥과 장국이 생각났다.

협곡을 돌아나가는 길은 무척 험했다. 돌멩이와 진흙이 엉겨 붙어 얼어버린 바닥은 미끄러웠다. 눈이 몇 차례 내리고 녹길 반복하다 한겨울이 되자 얼음판이 됐다. 비탈길에서는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추위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걸어서인지 중심을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장준하는 낙오자를 돕기 위해 대열의 후미에서 걸었다. 낙오자는 체력보다는 감기 몸살 때문에 발생했다. 일행 중 몇몇이 며칠 동안 걸으면서 쌓인 피로가 누적돼 미열과 오한을 동반한 고뿔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행군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뒤처지는 동지들의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행렬을 뒤따랐다. 반면 비교적 체력이 좋은 동지들은 앞장서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개척했다. 휴식은 웬만하면 천천히 걷는 것으로 대신했고, 식사할 때만 행군을 멈추고 얼어빠진 밀가루빵을 씹었다. 오직 허기만을 달래기 위해 곱은 손으로 빵을 입에 밀어 넣었다. 

임시정부로 가는 길은 겉으로만 보면 피난길 같았다. 행색은 계절에 맞지 않았고, 음식은 부족했으며, 적군에 쫓기듯 추위를 참아가며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주위는 인적 하나 없이 썰렁했고 알땅에서 고스란히 눈을 맞으며 밀가루와 옥수수를 실은 수레를 힘센 몇몇이 돌아가면서 끌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폭격도 없었고, 총을 든 군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의 얼굴에는 비창한 표정도 없었다. 힘들었으나 고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충칭으로 가는 기대와 희망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게 했다. 

장준하는 품속에 파고드는 한기와 맞서며 다짐했다. ‘나는 충칭에 가면 조국 독립을 위해 불의나 이기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을 보고 듣든 간에 내 소신을 그대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곱씹었다. 

하늘의 뜻에 맡긴 생사화복 - 찬바람을 뚫고서

장준하 일행이 중앙군관학교를 나선 지 닷새 후 새로운 식구가 합류했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조국 독립을 도왔던 사람들이었다. 장준하는 힘겨운 여건에서도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이들을 환대했다. 그 어떤 보상도 모자랐다. 지금으로서는 이들이 충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가슴 한편에는 근심이 하나 더 늘었다. 이들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충칭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이들이 입은 옷은 동복이 아니었다. 한랭한 바람이 그대로 피복을 파고들 만큼 얇은 옷이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속옷을 여러 벌 껴입었지만 제대로 된 동복을 대신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서로가 보모 역할을 해주면 됐다.

 

문제는 일본군 점령지역을 지날 때였다.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기가 쉬웠다. 아이들은 아무리 입단속을 시켜도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고, 만약 일행이 발각돼 재빨리 도망쳐야 할 때 어른들이 품에 껴안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행 앞에는 일본군이 점령지역인 평한선 철도가 가로막고 있었다. 

일본 제1군은 평한선 철도를 따라 남하해 보정에 주둔한 중국군을 공격했고, 제2군은 진포선 철도를 따라 남하해 창현을 점령한 뒤 석가정을 점령했다. 석가정은 평한선 철도의 교차점이었고, 인력과 물자가 모이는 주요 군사 요충지였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평한선과 진포선 철도를 중심으로 반격을 전개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중국군은 평안선 철도를 포기하고 임분으로 후퇴했다. 임분은 험준한 산악지대라 일본군도 추격을 멈췄고, 평안선 철도 일대는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일본군의 점령지였다.

장준하는 생사화복을 하늘의 뜻에 맡겼다.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일본군에 입대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은 몸으로 충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열원했던 조국 독립이 있었다. 반드시 그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늦게 합류한 부부들과 아이들을 티 나지 않게 보살폈다. 너무 잘해줘도 부담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라는 것을 이들도 잘 알았다.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사소한 사고가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전쟁이 낳은 비극 - 중국 중앙군과의 조우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찬바람을 동반한 눈보라가 몰아쳤다가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함박눈이 펑펑 내려 소복소복 쌓였다. 눈이 그치고 햇빛이 하얀 산과 벌판에 반사돼 일행의 눈을 찔렀다. 

장준하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간단하게 요기했다. 나뭇가지도 주어 모았다. 바싹 마른나무 가지들을 뚝뚝 끊어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은 불꽃을 탁탁 튀며 활활 타올랐다. 일행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모닥불을 쬐며 축축해진 옷가지와 양말을 말렸다. 퉁퉁 부은 발은 열심히 주물러 동상을 막았다. 어떤 이들은 곤한 잠에 빠졌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바로 기절한 사람처럼 바닥에 눕자마자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휴식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매일 걸어야 할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밤에도 쉬지 않고 걸어야 예정된 시간 안에 충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식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겨울 행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아사와 동사였다. 굶거나 동상에 걸리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을 행군해도 버틸 만했다. 일행은 발가락이 얼어 감각이 없었지만 의연한 자세로 달빛을 가르며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정도의 어려움 따위에 굴복할 수 없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 여명이 대지에 조심씩 스며들었다. 장준하 일행은 평한선 철도 인근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은 것처럼 차갑고 삭막한 분위기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강물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마을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가득했다. 가옥들은 잇따른 포격으로 불에 타거나 군데군데가 무너져 내렸다. 밭은 전투기 폭격으로 구멍이 났고, 몇 년째 농사를 짓지 못했는지 황폐화됐다. 주민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피난을 떠난 것인지, 포화에 휩싸여 죽은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 넘치는 세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중앙군 정규군 부대가 평안선 철도를 건너기 위해 집결했다. 중앙군의 옷차림은 너저분했다. 바싹 마른 몰골에 피부도 까맣게 그을렸다. 춘궁기에 밥을 얻어먹기 위해 마을을 떠도는 거지꼴이었다. 군인들의 눈빛은 휴식과 평화를 원했다. 일본군과 계속되는 전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일본군에게 쫓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악취 나는 중국군의 전횡 - 사전 타협 혹은 상호 이해

중앙군은 평한선 철도를 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철도 탈환 작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과 협상해 철도를 건너가려고 했다. 장준하는 차림차림이 남루한 군인들이 가마 50여 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사단장과 고급 장교들의 가족과 애첩들이 탄 가마였다. 그는 중앙군관학교에서 중국군이 일본군과 모종의 거래를 한 뒤 적진을 빠져나왔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충성스럽고 용감무쌍한 군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지만 종종 비열하거나 파렴치한 사령관들이 공공연하게 일본군과 협상해 개인의 안전을 도모했다. 협상은 언제나 모욕적이었다. 일본군은 군인들의 목숨 값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을 만큼을 대가를 중국군에 요구했다. 또 중국군이 자신을 속이고 갑작스레 공세를 펼칠 수 있기 때문에 대가를 모두 얻은 뒤에야 비로소 응했다. 대가는 대부분 일본군의 노역에 중국 주민들을 대규모로 동원시키는 것이었다. 중국군은 군말 없이 일본군의 흥정을 받아들였다.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국민을 이용하는 전횡이었다. 

장준하는 마을에 주민이 없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다. 주민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가 노역 중이었다. 노역에 동원된 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다 영양실조로 죽는 일이 속출했다. 탄광이나 광산에서 일하다 갱도가 무너져 매몰되는 이들이 허다했다. 일본의 부당한 대우에 반항하거나 노역에서 빠지려고 몰래 탈출을 시도하다가 즉결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일본군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전쟁 중에는 모든 주민이 군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총살을 면치 못했다.

장준하는 격분했다. 사령관에게서 짐승 사체가 썩는 악취가 풍겼다. 남의 나라 일이라지만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공포와 굶주림이 허덕이며 목숨을 연명하는 국민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군의 탐욕과 횡포에 치가 떨렸다. 그는 전쟁이 남긴 비극을 보면서 가슴을 쳤다.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끝맺고 다시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단죄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이 부른 상처를 털어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한국이 해방되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부정을 발본색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시작은 친일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