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가 죽기 전 그날 새벽. 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공부하는데 별도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주로 새벽시간을 이용해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세수를 하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어와 꽃이 핀 가지를 흔들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이고 슬픔에 젖어 보이는 풍경이었다.
경대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종이를 펼쳤다. 부모님께 메모를 남기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금방 올게요. 경대 올림
잠에서 깬 아버지는 경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라고 썼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툴게 ‘어머니’라고 고쳐 쓴 편지였다.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고 챙기는 아들 녀석이 기특했다.
“싱거운 녀석 다보겠네. 여보, 여기 메모 좀 봐요. 경대가 메모를 남기고 나갔어요.”
“우리 경대니까 그러지요. 타고났어요. 인사를 꼭 해야 직성이 풀리잖아요.”
부모님은 어른스러운 경대가 마냥 자랑스러웠다. 이 메모가 경대의 마지막 유언이 될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의 친구 아들이 입원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친구 아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생각보다는 친구 아들이 많이 아프지는 않아 걱정은 좀 가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일일이 근황을 물어보면서 필요한 것을 챙겨주었다.
병원에서 나온 어머니는 시장에 들러 경대에게 먹일 음식을 잔뜩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친구가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같이 갈 데가 있어.”
친구는 다짜고짜 어머니를 데리고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왜 그래.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어딜 가는데?”
“가보면 알아. 기사님, 연대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주세요.”
“세브란스 병원?”
어머니는 누가 또 아픈가 싶어 내심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병원 앞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경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경대가 새벽에 남기고 간 메모를 생각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녁 8시 30분경, 택시에서 내린 어머니의 귓가에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들려왔다. 영안실을 지키고 있던 학생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강경대를 살려내라.”
어머니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여서 학생에게 업혀 영안실에 들어갔다.
“경대야. 경대야. 경대야. 경대야. 경대야. …….”
‘우리 아들이 죽다니,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아니야. 경대가 아닐 거야.’
아버지와 선미는 모두 영안실에 도착해 있었다.
선미는 7시경 응급실에 들어가서 경대의 죽음을 확인한 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실신했다.
아버지는 총학생회와 학교 측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달려왔지만 엄청난 충격 때문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7시 40분경 영안실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분신 같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 온몸이 벌벌 떨리고 사지가 얼어붙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고,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너무나 소중한 내 아들 경대야. 내 살이 터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 종아리 한 번 때리지 않았던 어미의 마음도 몰라주고 잔악한 독재정권의 쇠파이프에 맞아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린 것이냐. 머리, 가슴, 허리, 팔, 다리 어디 성한 데가 하나도 없구나.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갑자기 어머니의 눈앞으로 많은 열사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투사부터 박종철, 이한열 열사까지 모두 떠올랐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총알받이가 될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하면서 그 자리를 지켰던 광주 시민들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껴져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어머니는 영안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경대의 시신을 지켰다. 1년이고 2년이고 죽을 때까지 아들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행여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잊히고 나면 경대의 억울한 죽음은 어떻게 되나, 고민하면서 경대가 입버릇처럼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엄마. 늙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 제가 뭘 하는지 꼭 지켜봐주세요.”
어머니는 경대가 이렇게 죽으려고 그랬나 싶어 끝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살을 에는 슬픔이 밀려와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삼일 밤낮을 실신 상태로 보내다시피 누워있다 다시 일어났다. 경대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주저앉아서 울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는 경대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고 4월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픈 영혼이 토해내는 통곡이었다.
“경대는 이제 국민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내 아들입니다. 저는 100만 명의 아들을 얻었었습니다. 경대야. 경대야. 내 아들 경대야.”
이 모습을 지켜본 학생들은 모두 눈물을 훔쳤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복수’하리라 다짐하면서 힘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학생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면서 경대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쟁취와 통일의 그날까지 학생들과 함께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는 민주화가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주부였다. 운동권이 무엇을 위해 집회나 시위를 하는지도 몰랐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목숨 걸고 갔을 때에도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정도로 생각했고, TV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죽어가는 사건을 보면서도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경대가 죽고 난 뒤 어머니의 삶은 바뀌었다.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과 함께 싸우는 투사가 됐다.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유가족의 입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경대 부모님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갖가지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웠고, 시민들에게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투쟁’이 만들어졌다.
한편 당시 병원에는 갖가지 흉흉한 얘기가 도는 등 경대의 죽음을 훼손하려는 음모가 도사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노태우 정권의 사주를 받은 끄나풀, 일명 프락치가 경대의 장례문제 등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켜 다투게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정말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억울한 주검을 앞에 두고 벌인 야비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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