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12시. 여학생 22명이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서부서 항의방문 투쟁 출정식’을 갖고 서부경찰서로 향했다. 여학생들은 서부서 앞에서 ‘총학생회장을 석방하라.’를 외치며 경찰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잡아 가뒀다. 선미도 총학생회장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경찰의 억센 팔뚝에 붙들려 개 끌려가듯이 질질 유치장으로 잡혀갔다.
경찰은 여학생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 조사했다. 선미도 범죄자처럼 불려 앉아 경찰과 마주했다.
“주소, 학교, 학년, 과, 이름 대.”
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라고 해서 죄 없는 사람을 가둬서도, 그들이 개인의 정보를 알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미는 경찰들을 향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쏟아냈다.
“정권의 하수인들. 노태우에게 빌붙은 자들.”
“임마. 나도 4·19 때 데모해봤어. 너희들 마음 모르는 건 아니야. 경찰이 그렇게 밉니?”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울분이 치솟습니다. 왜 변하셨나요?”
“그거야 이런 공직에 있으면 …….”
“근데, 혹시 너 동생이 강경대냐?”
“아닙니다.”
“경대가 네 동생 아냐?”
“아닌데요.”
선미는 경대에게 해가 갈까봐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자꾸 캐물었다.
“경대가 네 동생 맞지?”
선미는 취조를 받으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찼다. 하지만 경찰이 경대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슬픈 눈빛을 보이자 선미는 순간 마음이 흔들려 경대가 동생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잠시 후 경찰은 선심을 쓰듯이 순순히 선미를 유치장에서 내보냈다.
선미는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여학생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경대 때문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잡혀 들어간 여학생들을 걱정해주는 ‘동지애’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미는 발을 동동거리며 자기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겁이 덜컥 났다.
한 후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경대가 다쳤어요. 시위하다가 경대가 …….”
“경대가 왜? 어떻게 됐는데? 경대가 다쳤니? 얼마나? 경대는 지금 어디 …….”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있어요.”
선미는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땅이 흔들리고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제발 경대에게 별일이 없기를, 아니 경대를 살려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제발 경대야. 누나가 지금 간다. 네가 있는 곳으로 간다. 제발. 제발. 죽지 마. 경대야. 경대야. 미안해.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이제부터 거리에서 시위할 때, 학교에서 집회할 때, 누나가 네 손 꼬옥 붙잡고 있을게. 경대야. 제발 살아만 있어. …….’
선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정문 앞에 서있던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우리 경대 어…… 어디 있어요?”
“어, 경대.”
“경대는 괜찮아요?”
“의식이 돌아왔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학교에 가라.”
선배는 선미가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을까 고심하다 거짓말을 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선미는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과 안도감이 뒤섞어 나오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절대로 경대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학교로 향했다.
선미는 어둠이 자욱이 깔릴 무렵 학교에 도착했다. 교내에는 장송곡이 음울하게 울려 퍼지고 운동장에는 검은 천막이 내걸려 있었다.
선미는 낯선 학교 풍경에 ‘무슨 일일까 혹시’ 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배 얘기를 굳게 믿고 아픈 다리를 끌며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선미의 귓가에 신나게 웃고 떠들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층에 있는 한 동아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선미는 이런 시국에 한가하게 노래나 부르고 있는 학우들을 이해할 수 없어 위층으로 달려갔다.
“지금 정신이 있습니까. 학우가 다쳤다고 하는데 지금 노래나 부를 때입니까.”
학생들은 멍한 모습으로 선미를 바라보며 노래를 멈췄다. 하지만 얼굴에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선미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궁금한 점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그 즉시 행동으로 실천하는 성격이었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때론 학우들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고, 동기를 부여하고, 다독거리면서 독려해야 할 상황에서도 ‘같이 싸워야지 모른 척하지 마라.’고 얘기할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융통성 같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먼저 실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선미의 진심을 알기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경대도 이런 점이 누나와 닮았다.
선미는 착찹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친분이 있는 동기, 선후배들이 나타나자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흘렸다. 학우들도 선미가 울자 우르르 달려와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눈물의 의미는 달랐다. 학우들은 경대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선미는 몰랐다.
선미는 울고 있는 학우들을 걱정하며 안심부터 시켰다.
“경대 의식 찾았대. 이젠 괜찮대. 너무 걱정하지 마.”
“…….”
학우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심고심하며 속을 태웠다.
한 선배가 선미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경대가 죽었어.”
“경대가요?”
선미는 경대의 죽음을 부정했다. 경대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모두들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네 동생 경대가 죽었어.”
선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선미를 붙잡고 말했다.
“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서 죽었다구.”
가혹한 현실이었다. 선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입으로는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제가 좀 전에 병원에 다녀왔단 말이에요.’를 외쳤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미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 하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경대를 보자마자 다시 쓰러져 안정을 찾을 때까지 계속 병원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선미는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이 새록새록 살아나 미칠 것만 같다.
선미는 경대가 죽고 일 년 가까이 폐인처럼 지냈다.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혀를 깨물며 참아야 했다.
이후에는 정신을 차리고 선전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설득해서 경대의 추모식에 동참시키는 일을 했다.
선미는 강의실을 돌아다니면서 추모식 동참을 독려하는 동안은 경대가 동생이라는 생각을 하면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가슴속에 흐르는 쓴 눈물을 닦아내며 슬픔을 참았다. 객관적으로 경대의 죽음을 말하자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냉정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도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후배들은 선미가 경대의 누나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두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선배님이 강경대 열사 누님인 줄 몰랐어요.”
“어떻게 남의 얘기하듯이 말할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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