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17. 배우고 깨닫고 싸우다

이동권 2021. 11. 15. 15:19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서 노래하고 있는 경대(오른쪽 두 번째)

 

강경대는 명지대 합격통지서를 받은 다음날부터 매일 학교에 갔다. 재수할 때부터 선미가 활동하고 있던 탈패 동아리 ‘탈터사랑’ 선배들과 맥주 한 잔씩은 할 정도로 친분이 있어 학교가 낯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3학년이었던 선미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붙임성이 좋은데다 눈치를 보기는커녕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곧잘 말을 걸 수 있었던 성격 덕분이다.


경대는 선배를 만나면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았다. 머릿속에 맴돌았던 문제나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꼬치꼬치 물었다. 그래도 선배들은 귀찮아하지 않고 허허 웃으며 경대를 상대해 주었다. 경대는 선미와 함께 있을 때도 개념치 않았다. 선미를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선배들과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선미가 집에 가자고 재촉을 하면 경대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선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대하는 경대의 성격이 부러워 따라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경대의 이런 성격은 억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천성이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었다. 뭐든 닥치는 대로 배우길 원했다. 숨 막히는 입시 때문에 억눌렸던 기분을 모두 털어버리고,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학과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대는 매일 아침 혼자 밥을 챙겨먹고 6시 30분에 집을 나서 토플을 들었다. 또 졸업할 때까지 다섯 개의 자격증을 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첫 번째로 공인회계사 수험서를 열독했다. 몸이 견디지 못해 코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했으며, 정열적으로 모든 일을 대했다. 경대는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선미는 경대가 공부만 하다가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까봐 충고했다.


“여자 친구도 사귀면서 쉬엄쉬엄 공부해. 아직 시간도 많고, 책 이외에 배울 것도 많아.”


경대는 단칼에 선미의 말을 잘랐다. 


“알았어. 누나. 일단 하기로 한 거니까 열심히 해볼게.”


경대는 선배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깨우치는 것도 좋아했다. 동기들에게도 이 같은 기쁨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만 하는 동기들부터 팝송을 흥얼거리며 놀기 좋아하는 동기들까지 모두에게 집회 참가를 독려했다. 하지만 동기들의 거부감이 상당해 쉽지 않았다.


“경대야. 안 나갈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열심히 해.”
“궁금하지 않아? 왜 선배들이 매일 데모하는지?”
“궁금하기는 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위에 참가할 순 없잖아.”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선배들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전경들과 과격하게 몸싸움 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아.”
“시위에 나가는 선배들 옆에 서보지 않고서 어떻게 선배를 이해할 수 있겠어. 그러지 말고 나와서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봐. 그럼 선배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경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동기들을 악착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동기들은 경대의 끈질긴 설득을 마냥 거절할 수 없었다. 경대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너 믿고 한 번 나가볼게.”


경대는 집회에 나갈 때마다 ‘제폭구민’(除暴救民: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함)이라는 글자가 박힌 연둣빛 경제학과 티셔츠를 입었다. 동기들은 경대가 이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면 장난스럽게 한 마디씩 건넸다.


“임마. 인물 났다. 정말 잘~ 어울린다.” 


선배들은 집회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하는 경대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주된 내용은 학원자주화투쟁과 노태우 정권에 대한 얘기였다. 또 30년 만에 지방선거가 부활될 참이어서 자연스럽게 선거 이야기도 화두에 올랐다. 


처음 경대는 선배들의 얘기가 무척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러나 지루해하지 않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정부의 주도하에 치러지는 이번 기초의회선거에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나부터도 처음에는 이번 선거가 금품살포로 결국에는 민자당의 세력만을 넓히고 수서비리를 감추려는 은근한 의도를 신문으로 파악했었기 때문에 별로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정은 어떤가. 이젠 정부에서 한 술 더 떠서 타락선거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민자당 소속이 아닌 다른 의원들에게 공공연히 위협을 주고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협박전화까지 온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또 후보의 거의 60~70%가 민자당계 의원이라고 하니 누구를 골라서 찍어야 될는지도 의문이다. 겉으로는 정부의 수서비리도 감추고 세력도 넓히자는 생각이 실현되고 있는 듯 하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그 자체를 후회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민주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정부에게 경고하고 싶다.

경대는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하면서 경제학과 동기들이나 선미에게 자기의 의견을 곧잘 얘기하고, 충고도 했다.


“좋은 책을 읽어야 해. 자본가의 입장에서 쓴 경제학 서적보다는 일한 만큼 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억압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책이 민중을 대변하는 올바른 책이지.”


선미는 경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안쓰러웠다. 동생이 대학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뿌듯함도 느꼈다. 


‘현실의 모순에 열성적으로 대항할 줄 아는 너는 역시 내 동생이다.’


경대는 산적한 노태우 정권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파헤칠수록 고민이 많았고, 그만큼 마음도 아팠다. 또한 그럴수록 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경제원론’, ‘껍데기는 가라’ 등의 사회과학 서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책도 많이 읽어야겠다. 어서 빨리 나의 주관을 세우고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기르자. 

경대는 사회과학 학회,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 참여해서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견해도 정확히 밝혔다. 

내가 오리엔테이션에 갔었을 때 파업전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본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사실이고,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전두환 정권 때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겼고, 요즘에는 교묘히 탄압한다고 들었다. 즉 지도자를 잡아넣는다든지 잦은 수색, 구속으로 결합을 와해시킨다고 들었다. 헌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이런 폭력이 있었는데 5공 때는 얼마나 탄압이 심했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현 정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결국 5, 6공 모두 자신들의 장기집권과 권력독점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나의 걱정은 우리나라의 장래와 현실의 어려운 상황이다. 정치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 6공이 집권한 뒤 정치범이 감옥을 채우고, 전경이 늘고 그들의 무기도 개량되고, 민생치안은 엉망이고 가장 심각한 게 물가다. 매일 하는 말들이 임금인상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공무원의 임금이 20% 뛰어올랐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때로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와 맞물려 탄압받는 학내상황들을 이해할 수 없어 분노했다. 그래서 경대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쩌면 경대는 그 어떤 해답을 찾기 위해 시위를 하다가 짧은 삶을 불태웠을지도 모른다. 


경대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요즘 학교에서 선배에게 좋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뭘 배우는데 이리 좋아할까?”
“민주주의요.”
“데모하고 다니는 거냐?”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더라도 앞장서지는 마라.”


아버지는 경대가 대견스러우면서도 데모에 깊게 빠질까 고민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는 아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자식 교육이 남달랐다. 자식의 의견과 주장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함께 의견을 나누고 격려하면서 좀 더 올바르게 판단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고, 자식이 올바른 주장을 하면 전폭적인 지지도 아끼지 않았다.


부모님이 선미가 마당극을 공연한다고 해서 학교를 찾아갔을 때다. 성조기를 찢으며 반미를 외치는 정치극이었다. 부모님은 극 내용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학예회에 온 표정으로 즐겁게 관람했다. 마당극이 끝나고 나서는 동아리방에까지 와서 격려도 했다. 딸에 대한 믿음, 곁에서 지켜보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교육철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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