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20. 총학생회 진군식

이동권 2021. 11. 15. 15:39

총학생회 진군식에서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

 

3월 22일. 명지대 민주계단에서 총학생회 진군식이 열렸다. 명지대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의 학원 탄압을 분쇄하고, 터무니없는 등록금 인상률을 저지하자는 각오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대는 무대 뒤에서 ‘따람’ 회원들과 함께 ‘투쟁의 한길로’를 열창했고, 선미는 탈반 학우들과 함께 무대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쳤다. 학생들의 기세는 몰아치는 폭풍우 소리처럼 커다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이날 진군식에서는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이 진행됐다. 집회할 때는 상징의식을 하지 않을 것처럼 전경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깜짝쇼’처럼 감행했다. 진군식이 끝나기 전까지 전경들의 교내 진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경들이 처음부터 교내로 진입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할 때만 막았다. 하지만 상영금지조치가 내려진 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상영을 둘러싸고 경찰과 학생들의 공방전이 되풀이되면서 전경들이 학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경찰들은 학생들의 반미투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서 성조기를 태우면 곧바로 난입했다.


상징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자 경찰들이 학내로 어김 없이 치고 들어왔다. 놀란 학생들은 최루탄과 곤봉을 피해 본관 건물로 피신했지만 전경들은 잡아 죽일 기세로 끝까지 쫓아가 잡아들였다. 경대도 전경들을 피해 본관 건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교내 운동장 뒤쪽에 고립된 학생들은 쫓아온 전경들과 결렬하게 싸웠다. 각목, 돌, 쇠파이프 할 것 없이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집어 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학생들은 머리가 깨져 피를 흘렸고, 전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군식 이후 학교에서 집회를 하면 서부서 소속 전경들뿐만 아니라 시경 소속 전경들까지 투입됐다. 그럴수록 학생들의 투쟁도 더욱 거세어졌다. 학생과에 이어, 부총장실, 총장실로 강도를 높이면서 점거농성을 이어갔고, 학생회장이 선봉에서 시작했던 삭발·혈서 투쟁에도 일반 학생이 동참했다.


경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친한 선배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삭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그래서 자신도 좀 더 힘내서 투쟁에 나서겠다고 결심했다.


“선배님들이 자랑스러워요. 정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저도 힘이 저절로 나네요. 열심히 할게요. 선배님.”


이틀 후 민주적 등록금 책정과 언론탄압 분쇄를 위한 ‘범 명지인 1차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명지대 전체 학생의 3분의 1이 참여해 서로 놀랐다. 그 어떤 대학에서도 이만큼 똘똘 뭉친 곳은 없었다. 당황한 학교 측은 마지막 추가등록기간을 공고하고, 등록하지 않은 학생들에 대해서는 제적시키겠다고 압박했다. 또 학생회를 구심점으로 학내 투쟁이 전개되자 학생회비조차 내주지 않았다. 숨통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 셈이다. 


4월 9일에는 서울 서부지역 대학생들이 명지대 학원자주화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명지대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고 등교 선전전, 철야농성, 토론회, 농성장 방문투쟁을 꾸준히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일에는 4·19 정신 계승을 위한 마라톤 대회를 열어, 마라톤 대회 도중 총장 사택을 항의방문하고, 모래내(지명: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연좌농성을 진행했다. 


경대는 4·19 집회 중에 민중노래패 ‘따람’ 회원들과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며 학생회관 11층에서 북을 쳤다. 그날은 경기도 일영산장으로 경제학과 수련회를 가는 날이었지만 경대는 학우들의 힘을 돋우기 위해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경대는 전경이 쏜 직격탄을 얼굴에 맞아 오른쪽 볼을 일곱 바늘 가량 꿰매는 큰 상처를 입었다. 


경대는 마음이 씁쓸해져 선배를 붙잡고 말했다.


“선배님. 최루탄은 다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만들어지는데, 최루탄 때문에 다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네요.”


선미는 경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갔다. 선미는 경대의 상처에 때문에 피로 흥건히 고인 화장지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배와 동기들은 별일 아니라고 놀란 선미를 달랬다. 하지만 선미는 주위의 반응에 섭섭할 따름이었다.


‘자기 동생이라면 모두들 저럴까.’


경대는 선배들과 함께 병원에 갔다 다음날 귀가했다.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의 붓기가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집에 들어온 경대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경대야. 얼굴이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엄마. 지금은 괜찮아요. 산에 올라가다 넝쿨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 좀 꿰맸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경대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어머니는 경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거짓인 줄 알았다. 거짓말을 못하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이유를 늘어놓으니 영 서운한 게 아니었다. 
“친구랑 싸웠니?”
“아니에요. 넘어졌어요.”
“경대야. 다음부터 싸우지 마라. 네가 아프면 엄마 마음은 더 아픈 거야. 엄마가 싫어하는 게 뭔지 알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마음을 잘 다스려.”


어머니는 ‘말 못할 사연이 있어서 그러겠지.’ 생각하고 조용히 타일렀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속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경대는 군소리 한마디도 붙이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경대는 입이 벌어지지 않아 밥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죽을 쑤어 빨대로 먹게 했다.


“세상에. 얼마나 아프면 입도 못 벌릴까.”


경대는 아무 말 없이 죽을 먹고 난 뒤 어머니의 걱정을 누그러뜨려 주고 싶었다. 


“엄마, 내일부터는 밥을 주세요. 죽이 아니어도 잘 먹을 수 있어요.”
“귀찮지 않으니까, 엄마 걱정은 하지 마.”


어머니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픈 순간에도 자신을 챙기는 경대가 안쓰러워 가슴이 더 아팠다.


며칠 후 아버지는 경대의 상처가 직격탄에 맞아 생긴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분한 마음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직격탄을 쏴서 한열이를 죽이더니 또 누굴 죽이려고 하느냐.”


하지만 아버지는 경찰에 크게 항의하지 않았다. 대학 생활하면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었고, 경대가 스스로 앞가림을 잘할 것이라고 믿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아직까지도 그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경찰들하고 ‘싸움’이라도 한 번 해봤으면 경대의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혈서 쓰는 학생들
총학생회 진군식에서 춤을 추고 있는 선미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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