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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트롤 - 희망 없는 현실 까대는 애니, 그레이엄 애나블, 안소니 스타치 감독 2014년작

이동권 2022. 10. 27. 22:29

박스트롤(The Boxtrolls), 그레이엄 애나블(Graham Annable), 안소니 스타치(Anthony Stacchi) 감독 2014년작


등장인물부터 보자. 박스트롤. 몸집이 작고 생김새가 귀여우며, 치즈 마을 지하에서 발가벗은 채 박스를 쓰고 다니는 몬스터들이다. 반대로 악당의 두목은 어마어마하게 육중하다. 그의 부하들은 멍청하기 그지없다. 악당은 치즈를 먹을 때마다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 장면은 욕심을 부리면 안 되겠다고 느낄 정도로 징그럽게 묘사된다.

몬스터들은 너무도 순진해 저항할 줄 모른다. 악당에게 끌려가 노예로 일해도 찍 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지하의 유일한 인간 '에그'가 나선다. 에그를 돕는 건 당차고 똘똘한 소녀 '위니'다.

에그가 지하에서 몬스터들과 살게 된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 밝혀진다. 에그는 잡혀간 몬스터를 구출하기 위해 지상에 올라온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끔찍했다. 에그는 저열하고, 욕심 많은 인간에게 실망하지만, 끝내 진심 하나로 상처를 극복하고 악을 물리친다.

애니메이션 <박스트롤>은 소위 높은 사람들'을 절묘하게 비판한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지하로 치환해 민중의 고통, 위정자의 횡포, 사회의 부조리, 희망 없는 현실을 통찰하듯 그려낸다.

여자 주인공 위니 아버지는 치즈 마을의 유지이자, 화이트모자 조직의 대장이다. 그는 자신의 배를 채우고,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 민심을 외면한다. 세금으로 어린이 병원을 짓는 게 아니라 비싼 치즈를 사는데 쓸 정도다. 

위니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골몰하는 우리 사회의 누군가와 절묘하게 대입된다. 이를 테면 높은 자리에 앉아 민중을 핍박해 권력을 유지하고, 검은돈을 끌어 모았던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 총수 등이다.

악당 두목도 우리 사회의 누군가와 겹친다. 악당은 화이트모자의 일원이 되기 위해 몬스터를 천하의 악마로 둔갑시키고, 잡으러 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몬스터를 괴물로 여기고, 마녀사냥에 동참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죄 없는 사람에게 간첩죄를 씌웠고, 바른 소리를 해도 종북 논란을 일으켜 코너로 몰아세우기 바빴다. 이들은 또 권력을 쥐기 위해 범죄를 비호하면서 정의를 제거해 왔다. 

종국에 몬스터는 저항한다.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 차별과 부조리와 맞서 싸운다. 자신들은 노예, 괴물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친구라고 말한다. 부당한 권력의 폭력과 억압에 항거하지 않으면 스스로 권리를 찾지 못한다는 메시지겠다.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인간이 지닌 저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영화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스톱모션은 피사체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만든 한 컷을 이어 붙여 만든 영화다. 엄청난 인내와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질이 높다. 주인공의 양감과 디테일도 훌륭하며, 3D도 구현해냈다.
 
<박스트롤>은 예쁜 영화가 아니다. 그 흔한 노래도 없다. 잔인한 장면도 가끔 나온다. 주인공을 거꾸로 매달아 뜨거운 불에 넣으려는 신까지 등장한다. '더럽게' 웃긴 장면도 있다. 입맛이 싹 가실 정도로 사실적이다. 게다가 선악이 분명하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는 돼야 아주 재밌게 볼 수 있겠다. 

몬스터들이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 않아 좋았다. 보통 미국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물, 괴물 등이 인간의 말로 소통한다. 그럴 때마다 상상력의 부재가 느껴져 싫증이 좀 나곤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부류의 깐깐한 관람객까지 만족시킨다. 

이 영화는 줄거리와 반전이 매우 탄탄하다. 아무래도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이어서 그런 듯싶다. 이 영화의 원작은 영국작가 앨런 스노우의 소설 'Here Be Monster!'다. 이 책은 아마존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